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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31권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415 - 447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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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주교 블랑이 1885년 양로원을 설립하여 무의탁 노인들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조선조정으로부터 용인되지 않았었기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다. 천주교회가 설립한 양로원이었지만, 신자노인들의 보호라는 교회 내적 의미를 넘어서서 비신자들에게까지 혜택범위를 넓혔다. 양로원의 재정은 조선천주교회에서 감당하였고, 노인들을 돌볼 전문가도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수녀들이 파견되었는데 수녀들은 양로원보다 고아원에 관심을 기울였다. 블랑 주교에 이어 조선천주교회의 책임을 맡게 된 뮈텔 주교는 본당 설립과 성당 건축에 관심을 두었다. 블랑 주교는 신앙자유가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본당 설립이나 성당 건축이 어려웠고, 뮈텔 주교는 그를 뒤이어 본당 설립과 성당 건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로원에 보인 그의 관심을 아쉬움을 준다. 양로원은 천주교신자들에 의해 계속 될 수 있었다. 교회는 신자가 운영을 책임 맡고 있던 양로원에 부지매입비를 빌려준다거나 방문하여 미사를 드리는 등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이 양로원이 신자가 책임을 맡고 있었지만 천주교회와 깊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다. 평양교구의 선교를 담당하였던 메리놀회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양로원 설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해방 때까지 서울을 포함한 경성교구는 물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지역에는 1개의 양로원만이 있었다. 그러나 메리놀회는 1925년부터 본당들에 양로원을 설립하여 6개까지 증가시켰다. 이는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 교육과 의료 등을 중심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펼치던 곳이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일제는 양로원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수요에 즉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제도 대부분을 통치목적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의 양로원은 소규모였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한국인의 구호에 응답하였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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