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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회 국문학연구 국문학연구 제36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03 - 23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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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의 1807년 연행 체험과 청에 대한 인식을 살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공철은 1807년 연행 과정에서 조강(曹江), 이임송(李林松), 진희조(陳希祖) 등 청(淸)의 명사들에게 자신의 시문을 보이고 서문을 받아와 1815년 자신이 직접 편찬하여 인행(印行)한 문집 『금릉집(金陵集)』에 수록했다. 이들 중 특히 조강은 이미 조선 문사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기에 남공철은 서슴없이 조강을 찾았던 것이다. 또한 북경에서 남공철은 저유인(猪裕仁)․오사권(吳思權)과 직접 만나 필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남공철이 자신의 문집 서문으로 조강․이임송․진희조의 것만을 수록한 이유는 이들이 모두 명(明) 유민(遺民)의 후예인 한인(漢人)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 만나 교유한 저유인이나 오사권 역시 명 유민의 후예로, 남공철은 이들 명 유민의 후예에게 강한 연민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한 연민의식은 그의 대명의리론과 결부되어 만한(滿漢) 차별론으로 표출되었다. 한때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등과 같은 북학파들과 활발히 교유하고 고동서화 취미에 열성적이었던 남공철이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논의는 고사하고 오히려 만한 차별론을 내세워 애써 만청(滿淸)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은 의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대명의리론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가문적, 정치적 배경에 놓여 있었다. 부친 남유용이 남명(南明)의 역사를 정통으로 하여 명사(明史)를 다시 써 『명서정강(明書正剛)』을 편찬하고 대명의리론을 강고하게 내세웠던 점을 생각하면 남공철의 ‘만한 차별론’이 난데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 남공철이 친밀하게 교유한 이덕무(李德懋) 또한 명 유민에 대한 관심이 컸던 점, 당시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은 북학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대명의리론을 적극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는 점 등도 남공철의 대청의식(對淸意識)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공철은 한송절충론자(漢宋折衷論者)였다. 그러나 한학의 장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송학을 상대화하는 것, 즉 더 이상 주자 학설의 절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주자의 명분론에 기반한 대명의리론의 약화 소지를 애초부터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즉 대명의리론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한송절충론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자기 모순을 안고 있던 남공철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대명의리론은 만한의 차별을 통한 명 유민에의 예우 내지 그들에 대한 연민의식으로 나타났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자들도 대개는 대명의리를 부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북학과 대명의리 또한 모순되는 것이기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대명의리를 거론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거론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송절충론과 북학 논의가 활발해지던 18, 19세기 상당수 조선 지식인들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남공철이 연행한 후 15년이 지난 1822년, 추사(秋史)의 족숙(族叔) 김노겸(金魯謙)은 연행하는 족질(族姪) 김명희(金命喜)에게 연행과 관련하여 재고해야 할 점들을 정리하여 서문을 써준다. 이는 당시 연행 풍조에 대한 반성임과 동시에 19세기 초반에 취할 수 있는 대명의리론의 향방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공철의 연행 체험 및 그의 대명의리론에 견주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서문에서 김노겸은 연행 기록을 지나치게 세세히 하는 것의 부당함, 한인(漢人)이라면 가리지 않고 사귀어 그들로부터 받은 시문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한 경계, 중국 서적이라면 가리지 않고 들여오는 것의 무모함, 현실을 감안한 대명의리 인식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명의리론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던 당시 상황에서 무작정 의리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고 나라가 무사한 것이 우선이라며 엄중한 국제 정세를 감안한 현실적인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 대명의리론의 추이로 볼 때 남공철의 대명의리론은 19세기 초반 대명의리론의 종장(終場)에서 견지할 수 있었던 지식인의 심화된 자기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학(漢學)의 장점을 인정하여 주자학을 상대화하면서도 명 유민의 후예에 대한 연민의식의 표출을 통해 주자의 명분론에 기반한 대명의리론의 일단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가문적 배경과 정치적 위상 때문에 남공철은 직접 연행 체험을 하면서도 청의 선진 문물을 애써 외면하며 그것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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