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5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323 - 360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선 초기에 대비와 중궁 및 명부(命婦)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이나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을 막론하고, 춤과 노래는 모두 여악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악으로 인한 풍기문란 등의 문제가 종종 발생하므로, 치인(治人)의 위치에 있는 위정자(爲政者)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신(君臣) 간의 예연(禮宴)에서는 종래 여악이 해오던 춤과 노래를 남자아이로 대체하기로 하고, 1431년(세종 13) 8월에 이들이 입을 관복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때 무동이란 호칭이 처음 등장했다. 1432년(세종 14)에 공천(公賤) 중에서 10세가량의 어린 소년 60명을 뽑아 1433년(세종 15) 정월 회례연에서 공연한 것이 조선시대 무동제도의 시작이다. 무동은 <몽금척>⋅<오양선>⋅<아박>⋅<무고> 등의 정재를 공연했는데, 이들 정재는 노래와 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무동은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무동은 성인 남자의 체격과 목소리를 갖추기 전까지만 활동했으므로 대략 활동 상한선이 15살이었다. 무동을 뽑아서 교육시켜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무동을 뽑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1447(세종 29)에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로 구성되는 무동을 혁파하고, 노래와 춤에 능한 악공으로 하여금 정재를 공연하게 했다. 무동을 뽑지 않은 지 3년 남짓 지난 1450년(문종 즉위) 11월에 박연은 ‘외연과 객인연(客人宴)의 공연에, 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맑지 못하고 춤이 볼품없으니 가동을 뽑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연이 말한 가동 또한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1447년에 무동을 혁파했으므로, ‘가동’이라는 이름을 쓴 것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무동’과 같다. 박연의 건의가 채택되었는데, 󰡔악학궤범󰡕에는 ‘경오년(1450)에 무동제도를 회복했다’라고 서술하였다. 즉, 가동이나 무동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이므로, 서로 통용되었으며 때로는 아예 가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동이나 가동은 여악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므로, 여악과 대비하여 남악으로도 불렸다. 연향에서 가동⋅무동이 통용되었지만 ‘외연 남악제도’가 시행된 기간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하는 용어로 무동이 주로 쓰였다. 태조⋅태종대는 행행⋅강무에 여악을 썼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가동을 썼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음에까지 내몬 세조대(1455~ 1468)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제도들이 퇴행되는 것과 더불어, 세조 중년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여악을 썼다. 성종대(1469~1494) 사림의 정계진출과 맞물려 1473년(성종 4)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남악을 쓰게 되었고, 제도적으로 정립되었다. 비록 연산군대(1494~1506)에 일탈이 있긴 했으나, 중종대(1506~1544)에 다시 회복되어, 지속적으로 행행⋅강무에는 남악을 썼다.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1433년(세종 15) 이후 25년가량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년간만 시행되었고, 선조대 후반에 정착될 듯하다가 광해군대(1608~1623)에 무너지고, 인조반정(1623) 이후에야 확립되었는데, 행행⋅강무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성종대에 정립되었고, 연산군대에 흔들렸다가 중종반정(1506년) 이후로 확립되었다. 한편, 2016년에 <뎡상공 희방긔록(鄭相公回榜紀錄)>을 근거로 ‘조선후기에 사악(賜樂)으로 무동과 함께 기녀를 내려준 것’을 시사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위 논지와 정면배치 되는데, 정상공 즉 정원용(鄭元容, 1783~ 1873)이 회방(回榜)을 맞이한 1862년 일기의 어디에도 기녀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동을 여자처럼 꾸민 것을 비난한 바 있으므로, <뎡상공 희방긔록>에 나오는 ‘일대명기 절대기녀 무산신녀 ᄂᆞ려온듯’ ‘낙포선녀 하ᄀᆞᆼᄒᆞᆫ듯’이란 구절은 ‘녹의홍상을 입은 무동이 춤추는 자태가 기녀나 선녀처럼 아름다웠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