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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인호 (금오공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3집
발행연도
2017.7
수록면
43 - 84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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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 초 퇴계학파 월천계의 동향 속에서 월천 조목의 수문이었던 구전 김중청의 활동을 살펴보는데 연구 목적이 있다.
구전 김중청(1567~1629)은 퇴계학파의 재전 제자로, 조성당 김택룡과 함께 월천 조목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월천의 제자들은 스승의 언행과 행적이 퇴계 학맥의 수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1614년 퇴계를 주향으로 모신 도산서원에 월천의 단독 종향을 이루어내고 이를 예천의 정산서원과 봉화의 창해서원으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중앙에 진출한 월천계의 친대북적인 정치 성향으로 인해 향촌에서는 차츰 고립되어 갔다.
대북정권과의 협력 속에서 월천의 추숭과 종향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간 이가 김중청이다. 이 역할로 인해 비록 비판적인 관점에서의 언급이지만 퇴계의 도통이 월천 조목에게 전해지고 월천의 학맥이 구전 김중청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실제 활동에서도 김중청은 월천의 학문을 이어갔으며, 말년에는 구미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활동으로 월천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문인을 거느리고 있다. 김중청은 명실상부한 월천계의 적전이자 월천계의 학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중청은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북정권에 협력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으나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는 그다지 대북정권에 밀착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포의 봉화금씨, 한곡의 예안김씨 등과 함께 차츰 대북정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월천계는 대북정권의 붕괴 이후 지역에서의 기반이 적지 않게 퇴락하였으나 김중청의 1831년 반천서원 제향에서 보이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역에서의 월천계 학맥의 동향과 전승은 여전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학적 과제이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김중청의 학문 연원과 교유관계
3. 17세기 초 월천계의 동향과 월천 추숭
4. 북인정권과의 관계와 월천계 내 위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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