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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인호 (금오공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0집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369 - 410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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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현재의 구미시를 구성하고 있는 옛 군현인 선산과 인동지역에서 일어났던 임진왜란기 의병 활동을 살펴보는데 연구 목적이 있다. 여기서는 우선 지역 사족들이 임진왜란 직전 당시 정세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어 선산과 인동 지방관들의 초기 대응을 간략히 살펴본 다음 지역 사족들에 의해 이루어진 의병 활동을 살펴보았다.
1592년 4월 14일 부산포를 시작으로 22일 인동과 24일 선산을 점령하여 이듬해 5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오늘날의 구미 지역은 일본군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 선산부사 정경달<SUB>丁景達</SUB>과 인동현감 조첨<SUB>趙詹</SUB>이 주도한 관군의 항전이 있었으나 선산과 인동에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도 있었다. 당시 의병은 창졸간에 무너진 관군을 대신하여 이듬해인 1593년까지 주로 활동하였다.
선산과 인동은 일본군이 직접 주둔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읍내에서 벗어나 금오산, 해평, 장천과 천생산, 약목 등과 같은 외곽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선산 지역의 경우 해평에 근거를 둔 노경임 최현, 금오산에 근거를 둔 고한운 등이 의병을 주도하였으며, 상주의 김각<SUB>金覺</SUB>의진과 연계되어 있었다. 반면에 인동 지역의 경우 인동에 근거를 둔 장제원 장내범, 군위에 근거를 둔 이보와 장사진 등이 의병을 주도하였으며, 안동의 김해<SUB>金垓</SUB> 의진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해평의 경우 길운득 박수일 등이 의병을 주도하였는데, 낙동강으로 인해 교통에 어려움이 있어 선산부의 서쪽 무을 연악산에 기반을 둔 정경달의 관군이나 금오산에 기반을 둔 선산 의병보다 안동의 김해 의진과 소통하고 있었다.
당시 선산과 인동 의병이 직면하고 있던 상황은 쉽지 않았다. 군기가 상시적 부족하였으며,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전투 능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산과 인동은 경북의 남북부를 오르내리는 교통로의 중심지에 있었으므로 이 지역에서의 의병 전투는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또한 선산의 안강노씨 · 밀양박씨 · 전주최씨 · 해평길씨 · 안동고씨 · 신천강씨 · 덕수이씨와 인동의 인동장씨 등 당시 선산과 인동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들의 임진왜란 의병 참여는 후일 지역 사회에서 사족으로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지배집단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지역 동향과 전황
3. 선산 지역의 의병 활동
4. 인동 지역의 의병 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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