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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9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39 - 26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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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17세기 초반 예안 오천의 광산김씨 金光繼가 20대~60대에 걸쳐 쓴 『梅園日記』를 통해 그의 관계망을 살펴본 것이다. 광산김씨는 혼인, 학문, 경제적 기반의 확대, 의병 활동 등을 통해 향촌에서 명망 있는 사족이 되었다. 이를 물려받은 김광계는 박성·조목 등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히고, 류진·류암·박회무 등과의 교유를 통해 상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경세의 문인들에게까지 관계망을 넓혔다. 김광계와 그의 아우는 의성 지역의 사족과 혼인하였다. 의성에는 장현광 문인들이 많아서 김광계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교유했다. 김광계는 성주 출신의 鄭逑가 안동 부사로 부임하자, 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를 계기로 성주지역 사족과 교유하게 되었고, 아들이 성주의 광주이씨 이윤우의 딸과 혼인하여 이 지역 사족과의 관계망이 더욱 확고해졌다. 17세기 전반 상주의 정경세와 인동의 장현광이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이들의 연고지가 영남지역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김광계는 1636년 ‘여헌학’의 본산인 인동 부지암서당을 방문하여 장현광을 만났다. 이를 통해 김광계의 학문적 관계망은 인동까지 확대되었다. 즉 김광계는 정구·장현광의 문하에 출입하는 가운데 조목의 문인이었던 아버지의 관계망을 뛰어 넘어 상주·성주·인동지역까지 공간적 관계망을 확장했다. 그는 1630~40년대 예안의 대표적인 사족 기구인 도산서원의 원장을 가장 많이 역임했으며, 병자호란 당시 예안 의병을 앞장서서 조직할 만큼 향촌에서 그의 위상은 한층 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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