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옥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효원사학회 역사와 세계 역사와 세계 제47집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57 - 89 (33page)
DOI
10.17857/hw.2015.06.47.5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황제권은 왕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요소와 신민들에게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현실적인 요소의 권력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함풍제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청나라에는 진정한 의미의 황제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상징적인 권력은 변함없이 황제였지만, 현실의 권력은 두 명의 태후와 공친왕에 의해 분점되었다. 1884년 갑신역추(甲申易樞)는 공친왕으로 하여금 모든 직책을 내려놓게 만들었고, 권력을 자희태후에게 집중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공친왕이 제거됨으로써 권력이 자희태후에게 집중되고 그녀가 대리하고 있던 황제권은 더욱 강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황제권의 강화는 공적인 사용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런데 자희태후의 강화된 권력은 사적인 목적에 이용되었다. 1884년과 1894년 청나라가 각각 프랑스 · 일본과 전쟁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자희태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의 생일잔치였다.
자희태후가 의례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정치적 지위는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성장하고 바뀌게 되면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받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의례(儀禮)였다. 1884년과 똑같은 상황이 1894년에 되풀이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관료기구가 자희태후의 말을 따르고 비위만 맞추는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생산적이거나 혁신적인 정책들은 나올 수 없었다. 188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까지 청조가 보여준 무기력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때, 황족들의 결사적인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베이징의 자금성을 청나라 황제 보호구역으로 만드는데 동의하였다. 청나라는 존재하되 통치영역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황제는 중화 민국 초기의 혼전 속에서 군벌에 의해 쫓겨났고, 청나라도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목차

국문초록
Ⅰ. 청나라 쇠퇴의 이해
Ⅱ. 왕조체제와 현실권력
Ⅲ. 자희태후의 생일잔치
Ⅳ. 권력부재와 왕조붕괴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