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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하태규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26집
발행연도
2007.4
수록면
147 - 18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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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활동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연결시켜 파악함으로써 호남방어에 있어서 그 역할을 바르게 조명하고, 나아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바로 잡고자 한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전라도에서는 감사 이광의 주도로 관군이 동원되어 경상도와 충청도로 출동한 바 있었고, 이어서 대규모의 근왕병이 출동하였으나 용인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전라도 근왕병이 패배한 원인은 감사 이광의 무능이라기보다는 당시 동원된 사졸들의 전투 능력부족과 사기 저하, 그리고 근왕병 동원에 대한 반발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용인전투 후 전라병사 최원에 의하여 수만의 병력이 동원되어 북상한 후 왜군의 호남 침공의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감사 이광은 전전적 이정란과 함께 전주 부성의 수비 태세를 갖추고 웅치와 이치 등의 요해지에 관군을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금산을 점령한 왜군이 웅치를 통해 전주부성을 공격해 오자, 전라도 관군은 의병과 함께 웅치의 혈투와 안덕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를 격퇴함으로써 전주 부성과 전라도를 지켜내게 되었다. 이것이 웅치전투이다. 이 때 의병장 고경명의 움직임은 금산의 왜군을 견제하여 호남방어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웅치전투 이후에는 전라도 각 지역 수령이 지휘하는 관군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을 압박하며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관군의 금산성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금산의 왜군이 이치를 향해 공격해 오고, 이를 동복현감 황진과 광주목사 권율이 격퇴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치전투이다. 전라도 관군의 동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이치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8월 17일경으로 보인다. 그런데, 권율은 이치전투가 있기 전인 7월 22일에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임명 교서가 이치전투가 마무리된 뒤에야 전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마치 권율이 그 전공으로 전라감사가 된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에서는 관군이 유지되면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고, 호남의 방어는 전라 감사 이광의 지휘 하에 이루진 방어 태세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에서의 전라도 관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며, 어느 영웅 무장 한사람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임란 발발 직후 상황과 근왕병의 출동
3. 웅치전투의 전개와 전라도 관군의 활동
4. 이치전투의 실상과 권율의 임란 초기 행적
5. 맺음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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