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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봉룡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도서문화 도서문화 제36집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7 - 3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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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멸망 후 낙랑구는 B.C.2세기 말부터 약 400년 동안 연안항로를 통해서 동아시아 해상교역을 주도하였다. 3세기 초에는 대방군이 추가 설치되면서 동아시아 해상교역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분점하는 체제로 유지되었다. 영상강유역과 낙동강유역세력은 낙랑ㆍ대방군이 주도하는 해상교역의 충실한 파트너로서 번영을 구가했다. 영산강유역의 여러 나라들을 ‘신미제국’(신미의 여러 나라)이라 통칭하고, 낙동강유역의 여러 나라들을 ‘가야제국’(가야의 여러 나라)이라 통칭했던 것은, 당시 해상교역 체계에서 ‘신미’와 ‘구야(→가야)’의 위상이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4세기 초에 낙랑ㆍ대방군이 축출되자 동아시아 해상교역은 크게 위축을 면치 못했다. 낙랑ㆍ대방군 주도의 해상교역을 통해서 번영을 누리던 영산강유역 군곡리 세력은 특히 타격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낙동강유역은 좀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서ㆍ남해 연안항로가 위축되자 이에 위기를 느낀 구야국은, 동해안로를 통해 북방계문물을 유입하여 강성해진 신라와 제휴하여 문을 확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서쪽에 있던 8개의 포구도시국가가 이에 반발하여 구야국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른바 ‘포상팔국의 난’이 그것이다. 신라와 구야국은 반발하는 포상팔국을 제압하고 새로운 교역체계의 파트너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곧이어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서ㆍ남해 연안항로를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4세기 후반에 백제는 낙랑ㆍ대방군을 대신하여 새로운 서ㆍ남해 연안항로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여 이에 저항하는 해남지역의 신미 세력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친백제의 대안 세력을 인근의 고현리 일대에 세우고 백포만 일대의 새로운 거점포구로 활용하였다. 이와 함께 백제는 가야지역에 친백제 세력을 확산시키고 이들을 통해 왜와의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된 신라가 저항하기도 했지만, 중국의 선진문물을 앞세워 물량공세를 펴는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낙랑ㆍ대방군 주도기 영산강ㆍ낙동강유역의 동향
3. 낙랑ㆍ대방군 축출 직후 연안항로의 위축과 浦上八國의 도발
4. 백제 주도기 영산강ㆍ낙동강유역의 동향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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