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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46·247號
발행연도
2005.9
수록면
5 - 4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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梵天은 본래 고대 인도의 바라문교에서 ‘세계창조의 신’인 동시에 청정한 수행자의 표상이었고, 帝釋天은 무사적 기질을 지닌 ‘신들의 왕’으로서 풍요롭고 욕망지향적인 세속인의 속성을 대변하던 신으로 숭배되었으나, 불교에 수용된 후에는 불교의 가르침를 대변하는 호법신으로 변모하였다 경전에서 범천은 부처께 설법을 권청하고, 제석천은 불사리와 聖物을 숭배하거나 탑 건립의 주체로 등장하는데, 범천과 제석천의 이 두 가지 특화된 역할은 훗날 다양하게 반복되는 경향을 보였다. 불교미술에서 이 두 존상은 형태와 의미 면에서 서로 대비를 이루며 본존의 좌우협시로 등장함으로써 삼존상 형식의 시원이 되었다.
석굴암 범천ㆍ제석천상 이전의 도상으로는 중국 남북조시대 6세기에 활발히 제작되었던 소라형 머리의 상을 들 수 있다. 이 상에 대해서는 기존의 설처럼 緣覺像이 아니라 한역 경전을 바탕으로 성립한 중국화된 범천의 한 도상인 螺?梵王像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본 논문에서는 나계범왕상이 불교의 순환론적인 세계관과 깨달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도상으로서 그 기원은 인도의 바라문들의 외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北魏 孝昌 3(527)년명 삼존불비상 등, 근래에 중국 山東省 靑州에서 발견된 불비상 광배 상단의 양측에 소라형 머리를 하고 日月을 지물로 든 인물상 역시 나계범왕상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남도 燕崎郡에서 출토된 己丑銘(689년) 석조 아미타 佛碑像의 건물을 들고 있는 두 상을 석굴암의 예 이전으로 올라가는 초기 범천상의 한 종류로 보았다. 그 이유로는 불ㆍ보살ㆍ나한ㆍ범천ㆍ금강역사로 이루어지는 9존 불비상의 구성방식, 그리고 구마라집 역 『법화경』의 化城喩品처럼 범천이 부처에게 자신의 궁전을 바치며 설법을 청하는 장면과의 관련성을 주목했다. 범천권청은 본래 석가모니에게만 해당됐던 佛傳의 일부였으나, 이후 대승경전에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여래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으로 확대적용되었다. 건물을 든 도상도 범천의 이러한 설법을 구하는 求法 태도를 표현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8세기 중후반에 조영된 석굴암에는 원형 주실의 양쪽에 범천과 제석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두 상은 통일신라의 불상 중에서 도상과 배치, 그리고 경전 등에 관한 문헌적 근거가 확실한 예로서 본 논문의 핵심에 해당한다. 본 논문에서는 상 자체의 도상을 분석한 후, 전체 배치 면에서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석굴암 범천ㆍ제석천상의 도상 자체는 『陀羅尼集』의 卷3 般若畵像法의 범천ㆍ제석천상에 대한 묘사와 비슷하다. 이를 통해 범천은 가사를 입고 왼손을 내려 정병을 잡으며, 제석천은 천의와 영락을 두르고 왼손을 배로 올려 손바닥에 금강저를 올려놓는다는 것, 그리고 두 상은 모두 朝霞裙이라는 치마를 입고 머리에 ?箕光이라는 광배를 두르며 발밑에 ?座를 깔고 서서 오른손을 올려 불자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하군과 구유좌 등은 통일신라에서도 제작되었고 다른 문헌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국제성 강한 요소들이기도 하다.
『다라니집경』은 중인도 출신의 승 阿地瞿多가 652년에 장안의 慧日寺 浮圖院에서 새로운 밀교단법을 선보인 후, 그 단법의 근거인 『金剛大道場經』의 일부를 번역한 초기밀교의 백과사전적 경전이다. 통일신라에 『다라니집경』의 전래를 직접 밝힌 문헌기록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적어도 석굴암 조영 이전에는 수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경전과 별개로 시각 자료인 도상본 자체가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석굴암 범천ㆍ제석천상과 비교되는 상은 중국에 거의 없고, 奈良시대 일본의 상들이 몇 구 전한다. 석굴암의 상은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도상적으로는 보수성을 띠며 그 계보가 서로 달라서 석굴암 불상군의 국제적 보편성과 통일신라적인 특수성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석굴암 범천ㆍ제석상의 형상 자체는 이처럼 『다라니집경』의 반야화상법과 연관되나, 전체 구조에서 존상의 종류와 평면이 원형인 점 등은 『다라니집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석굴암 상에 대해서는 이 경전만으로 충분한 해석이 안 된다. 또한 그간 석굴암 존상배치의 특수성으로 지적되어 왔듯이 여래ㆍ나한ㆍ보살이 있는 聖所격인 원형주실 안에 天部神인 범천ㆍ제석천이 예외적으로 들어와 있다. 배치문제는 기본적으로 본존상과 유기적인 관계하에 고찰되어야 할 문제로서 권속들의 특징도 본존상의 성격에 수렴된다. 이런 점에서 항마촉지인 본존상과 범천ㆍ제석천상을 당시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과 연계하여 살펴보았다.
석굴암 본존상의 항마촉지인은 도상적으로는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을 상징하는데, 8세기 중후 반 당시의 통일신라에 유행하던 불교 사상, 신앙 및 역사적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석가모니불의 깨달음의 경지를 강조하고 그 설법광경을 묘사한 『화엄경』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석굴암의 발원자인 김대성이 석굴암이 조영 중이던 760년에 당대의 유명한 화엄승인 표훈에게 화엄의 三本定에 대한 교리적 자문을 구한 점, 석굴암 완공 후 표훈이 초대 주석자가 된 사실 등은 석굴암 조영과 전체 설계 면에 끼쳤을 화엄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석굴암이 화염과 영향관계가 있다면 여기에는 『화엄경』뿐만 아니라 그 주석서, 사상, 신앙, 화엄승들의 행적까지 함께 고찰될 필요가 있다. 석굴암의 범천ㆍ제석천상이 원형주실 내에 배치된 이유도 이처럼 화엄의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에 천착하였다.
『화엄경』에서는 부처가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에 몸을 나타내자 제석천이 범천과 함께 영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참조하면 석굴암 주실의 범천ㆍ제석천상은 단순한 호위신중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의 설법을 듣는 청중의 일부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화엄에서는 도리천과 그곳에서의 설법회, 그리고 인다라망 등 제석천에 관련된 사항들이 각별하게 중요시되었다. 심지어 제석천과 범천의 지위를 높여서 화엄의 10地 보살에 상응하는 계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화엄의 이러한 독특한 시각과 교리는 원형주실 내에 범천 제석천이 들어있는 석굴암의 존상배치법과 연결지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요컨대 석굴암은 석가모니의 정각 이후 천상의 도리천으로 대표되는 설법회, 즉 『화엄경』과 그 사상, 신앙을 종합하여 재구성한 일종의 조각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화엄과 『다라니집경』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화엄이 초기밀교계통의 도상들을 방편적으로 수용하여 결과적으로 양자가 융합되었다고 보았다.
석굴암 이후인 통일신라 후기와 그 영향을 받은 고려초기의 불교조각에서는 범천ㆍ제석천상이 석탑과 부도, 사리기 등에 등장한다. 기존에 이들은 별다른 근거없이 보살이나 천부 또는 팔부중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 중에는 범천과 제석천상이 적지 않다. 석굴암 이후의 범천과 제석천상은 지물과 자세 그리고 복식의 특징에 따라 네 가지 형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부분적인 변화가 발생하긴 했으나, 석굴암 범천ㆍ제석천상과 비교되는 도상은 주로 석탑표면의 부조에서 찾을 수 있으며 현재 총 9기가 확인된다. 중기밀교의 多面多臂形 범천ㆍ제석천 도상이 새롭게 유행했던 동시대의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에서는 석굴암의 상을 계승ㆍ변용하거나 새로운 도상을 선별적으로 수용하여 범천ㆍ제석천상이 제작되었다. 이는 다른 나라와 차별화되는 통일신라 범천ㆍ제석천상의 전통으로 지적될 수 있다.
석굴암을 비롯한 통일신라의 범천ㆍ제석천상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도상에 대한 개별적 고찰을 넘어서 신중상 연구의 체계화에 도움을 주고, 불교도상에 대한 다양하고 균형있는 시각을 갖추게 함으로써 한국 고대불교조각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study examines the origin and the iconographical meaning of Brahm? and Indra Images in Seokguram. Brahm? and Indra, deities from Brahmanism, were incorporated into Buddhism as coupled guardian deities. They play important roles in scriptures on the Buddha's life: Brahm? entreats the Buddha to preach, and Indra guards the Buddha's relics. These special roles have got variations in some Mah?y?na s?tras.
In representations of the Buddha's life in India, Brahm? appears as a religious practitioner, and Indra as a nobleman like br?bmanas and ksatriyas in the Indian caste system. Brahm? and Indra usually stand in each side of the Buddha in a triad form.
During the 6th century in China, Brahm? was frequently made with a conch-shaped head. Some scriptural accounts and epigraphical records indicate that they were called luoji fanwang (螺?梵王). This type probably derived from representations of br?bmanas worshiping Brahm? on the basis of a clear understanding of Buddhist teachings.
One of the earliest extant images of Brahm? in Korea is found in an Amit?bha Buddha stele inscribed with the cyclical year of Gichuk (689). Among the attendants of the Buddha, there are two figures holding up small buildings. These figures are most likely representations of Brahm? based on such scriptural accounts as the chapter of the "Parable of the Conjured City" (化城喩品) of the Lotus S?tra, where Brahm?, dedicating his palace, asks for the Buddha's sermon.
Brahm? and Indra in Seokguram should be considered from two different viewpoints: (1) analysis of individual images, and (2) their significance within the context of the overall structure of the sanctuary. First, their visual features are almost identical to the description in the Tuoluonijifing (陀羅尼集經) compiled by Atigo?a (阿地瞿多). Winnow-shaped halos and carpet pedestals have origin in the iconography of ancient India. Their belongings such as c?mara, kundik? and vajra often appear in visual images and literary source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The representations of the two deities in Seokguram are comparable in many ways to those from Tempy? period in Japan. Iconographically they exhibit the international universality of the period as well as the distinctiveness of Buddhist art of the Unified Silla.
The overall design of Seokguram is similar to the circular arrangement of Buddhist deities popular in the contemporaneous East Asian Buddhist art. However, unlike other deities including the Four Heavenly Kings placed outside, Brahm? and Indra are exceptionally installed inside tile main hall, which is mainly decorated with the Buddha, his disciples, and Bodhisattvas. Although tile iconography of Brahm? and Indra is associable with the Tuoluonijijing, this placement does not coincide with the s?tra, In order to explain more properly this as well as the structural significance of Seokguram, we have to look into other sources.
In the Unified Silla during the late 8th century, where the Auatamsaka -s?tra had prevalent influence, the design of Seokguram was closely related to the s?tra. First, the major patron of the monument, Kim Dae Sung, and the first head priest of the temple, Pyohun, had profound interest in the Atatamsaka-s?tra. Second, the earth-touching mudr?taken by the central Buddha signifies the Buddha's attainment of the Great Wisdom, which is the principal theme of the s?tra. Third, this s?tra describes an assembly of Buddha's preaching in various heavens including the Tr?yastrim?a, where Brahm? and Indra are present: Tr?yastrim?a and Indra are significantly highlighted in the s?tra and its diverse commentaries.
Brahm? and Indra were often calved on three-storied stone pagodas and monks' relic stupas in the form of a pavilion from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Those on stone pagodas were sometimes misunderstood as Bodhisattvas or devas. Like those on reliquaries, they usually follow the representations in Seokguram in costume and attributes. They are different from those on monks' relic stupas in the form of a pavilion, which more resemble Chinese examples or Esoteric Buddhist types with multi-faces and multi-arms popular in the contemporaneous China and Japan. Compared with Chinese or Japanese examples, Brahm? and Indra image of the Unified Silla distinctively followed the canon established in Seokguram rather than adopting new Esoteric Buddhist types fashionable in East Asia during the 9th century.

목차

Ⅰ. 머리말
Ⅱ. 梵天ㆍ帝釋天도상의 기원과 초기의 예
Ⅲ. 석굴암 梵天ㆍ帝釋天像과 관련경전
Ⅳ. 석굴암 梵天ㆍ帝釋天像의 계승과 변용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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