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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선아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70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59 - 82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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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봉화의 完山李氏는 태종의 7남 溫寧君의 후손이다. 온녕군의 후손들은 수양대군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계유정변을 부정하지 않았고 종친으로서 위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온녕군의 손자 李摠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그의 형제들이 모두 사사되는 정치적 불운을 겪었다. 이들을 세칭 ‘七公子’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종반정으로 모두 복권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녕군의 후손 李英基는 안동에 피난하였다가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안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영기의 아들 이시선은 비교적 안정된 여건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경전을 직접 필사하였으며 六經에 대한 讀書記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을 정리하여 夏華編을 편찬하였다. 이시선이 이렇게 학문에 전념하게 된 것은 胡亂으로 천하의 질서가 顚覆되는 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너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남인은 주자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의문점을 지적하면서 육경으로 학문적 반경을 확대하였다. 許穆은 그러한 학문적 경향을 보인 대표적인 남인 학자이었다. 허목의 六經에 대한 관심은 남인의 학풍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허목은 영남 남인으로 출사한 李玄逸, 李惟樟, 丁時翰 등과 직간접적으로 교유하였고, 이시선은 이들 영남 남인과 교유하였다. 피란객으로 영남에 우거하게 된 완산이씨는 이시선에 이르러 이들 영남 남인 학자와의 교유를 통해 남인 사족으로 성장할 수 기반을 닦았다. 비록 종친이라는 법적 지위는 사라졌지만 태종의 아들 온녕군의 후손이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영남의 종친가문으로 그 명맥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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