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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진성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47호
발행연도
2024.1
수록면
61 - 106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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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普通元年(520)永陽昭王蕭敷墓誌銘>은 梁 武帝의 次兄인 蕭敷의 墓誌로 오늘날 原石은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宋代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粧帖(剪裱本)이 유일하다. 이에 본고는 이 剪裱本의 圖版과 淸代 이래로 현재까지의 학자들이 남긴 釋文과 題跋을 종합하고 이를 비교, 검토하여 기존 釋文의 오류를 수정하였다. 본고는 확정된 釋文을 대상으로 한국어 번역과 注解를 진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묘지문에 담겨 있는 南齊, 梁代의 역사적 정황과 제도를 복원하는 한편 古代 墓誌의 정형화 과정에서 이 墓誌의 출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蕭敷는 梁이 건국되기 전인 南齊 明帝 建武4년(497)년에 사망했다. 따라서 그가 王號를 받은 것은 그의 동생 蕭衍이 황제가 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즉 그가 永陽昭王에 追封된 것은 502년이다. 그런데 그의 墓誌는 520년에 제작되었다. 墓主의 사망시점과 墓誌의 제작시점이 이렇게 차이가 나게 된 까닭은 520년 蕭敷의 부인인 永陽太妃 王氏의 죽음 때문이다. 蕭敷와 달리 그의 부인 王氏는 太妃로 進封되어 天壽를 누리다가 520년에 사망했고, 당시의 장례제도에 따라 그녀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에 合葬되었다. 이를 위해 蕭敷의 무덤이 잠시 개방되었고, 이때 당시 황제인 武帝는 형을 추억하면서 墓誌의 제작을 명령했다. 武帝는 당대 최고의 文士이자 고위 관료인 尙書右僕射 徐勉에게 墓誌銘의 작성을 특별히 勅書로서 명했다. 이 때문에 이 墓誌를 필자는 ‘奉勅撰墓誌’ 규정했다. 이를 통해 武帝가 이 墓誌의 제작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蕭敷墓誌> 이전의 남조 墓誌들은 정형화 된 唐代의 墓誌들에 비해 그 구성과 형식이 불완전하고, 독창적이고 새로운 시도들도 종종 확인된다. 반면 <蕭敷墓誌>는 序, 誌, 銘의 엄격한 분리, 標題 하의 撰者의 姓名 표기 방식 등이 모두 唐代의 정형화 된 墓誌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蕭敷墓誌>가 등장한 普通元年(520)부터 남조에서는 묘지명이 정형화의 단계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蕭敷墓誌>에 기술된 역사적 사실이 갖는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正史에 疏略한 그의 官歷은 墓誌에 상세한데 이를 통해 劉宋에서 南齊를 거치면서 東宮 소속의 관리인 太子洗馬의 위상이 提高되고 이것이 후에 梁 武帝의 18班制에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梁書 「武帝紀」에는 무제가 詔書를 내려 蕭敷를 왕으로 追封한 일만 기록되어 있고 그에게 정확히 얼마의 食邑을 내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蕭敷墓誌>에 인용된 追封詔書에는 武帝가 그에게 食邑 二千戶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당시 생존하여 왕이 된 무제의 다른 동생들, 즉 蕭敷의 형제들과 같은 수치다. <蕭敷墓誌>를 통해 당시 親王에게 하사된 식읍은 당사자의 생존여부, 서열의 고하와 관계없이 이천호로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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