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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용현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43호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117 - 158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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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도의 출납행정을 알 수 있는 문서로는 陵山里寺址의 支藥兒食米記, 雙北里의 佐官貸食記 등이 있다. 이들은 왕도 扶餘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능산리사지는 왕실 고분군에 위치한 陵寺이며, 쌍북리는 백제 관아지구다. 근년 扶餘 남부 花枝山 동쪽 기슭 아래 東南里 유적에서 출납관련 백제 목간이 공개되었다. 왕 도 남부에서 처음 출토된 출납 자료라는 점에서 지역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지표다. 출토 목간 5점 중 2 점 즉 목간1과 목간2의 사진과 내용이 공개되었다. 목간2는 곡물 稗의 지급 기록이다. 목간 양면을 각각 3단 으로 나누어 묵서하였는데, 전면은 稗逆이라는 표제어 아래 <瓦進+人名+丁+五斗> 서식으로 前面 4인, 後 面 4인 計 8인을 기록하였다. 丁은 백제호적제에서 成人男性을 칭한다. 逆은 受領이란 뜻으로, 이들 8人이 각각 稗 오두씩을 수령하였음을 기재한 것이다. 쌍북리 좌관대식기 목간에서 보이는 인명 앞에 붙은 佃은 소 작농이란 職役을 표시한다. 瓦進 또한 그와 같이 직역이며, 瓦를 貢進하는 부문으로 추정된다. 稗는 6-7세 기 신라 왕경과 지방 목간에서 2등 곡물로서 민간의 식량 중 하나였다. 백제에서도 같은 시기 식료였음을 알 게 해준다. 왕도 사비의 개발과 경영 과정에서, 왕궁·불교사원·관아에서 瓦의 수요가 있었고 이에 대한 조달 체계가 조직되었을 것인데, 徭役의 대상인 丁을 동원배정하여 瓦博士·瓦工같은 기술자 아래 보조역으로서 배정하여 관영조달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人丁 1인당 稗五斗는 직역 瓦進에 대한 대가 즉 급료 혹 식 료로 추정된다. 목간1은 金의 출납과 용처를 기록한 문서다. 상단이 파손되긴 했지만, 前後面 양면에 左右 일정폭을 안배한 대략 4행 서사였다고 판단된다. 단면은 凹凸(오목볼록)형상인데 보통은 凸面이 전면이다. 전 면은 <月日+亡+夫逆+金+數量>와 <月日+內已> 서식이 조합을 이뤄 기재되었다. 이들은 金의 출납관련 기 록으로, 內는 納이며, 已는 金이 납입,격납 완료되었음을 표시한다. 亡은 无로 金이 출납되어 없어졌음(亡損, 亡失)을 나태내는 용어로 보인다. 夫逆은 夫가 受領하였다는 뜻으로, 金 망손 즉 지출 경위 혹 요인, 수령상 황을 기록한 관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金의 수량으로는 주로 兩과 主가 사용되었다. 主는 앞선 6세기초 熊 津시대 公州 武寧王陵 출토 왕비 銀팔찌명문도 보이는 수량사였다. 후면은 <物品名 + 作 用 金 + 수량> 서 식으로 연속 기재되었다. “作用”은 “만드는 데 쓰다”는 의미여서, <어떤 물품을 만드는데 쓴 금이 얼마>라는 내용이 된다. 作用과 金 3자 가운데 1자가 생략되기도 했다. <어떤 물품> 부분의 일부는 <누가 (즉 사람)>일 수도 있다. 물품은 金이 활용되었으므로 金工品이다. 금공품 제작과 관련하여, 제작에 소요되는 金을 내어주 었다가 완성품을 다시 회수하여 격납하는 상황이 기록된 것이다. 발주가 이뤄지고 소정기간 제작을 거쳐 납품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金의 출납과 납품품목을 세세하게 기록한 장부문서다. 夫逆 즉 金을 주기적으 로 수령한 夫는 工과 함께 조를 이뤄 金工에 관여한 종사자로 보인다. 수령자의 성명을 쓰는 대신 일반명사인 夫로 대신한 것은 공지의 반복되는 관용적이자 일상적 상황이었기 때문이고, 취급자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서 말미까지 기재가 완료된 후에는, 위 아래를 거꾸로 돌려 빈공간을 찾아 기재를 계속하였다. 또 문서는 일시에 모두 기록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月日別로 金의 지급, 또 제품의 회수시에 그 때 마다 기록이 거듭된 것이다. 즉 追記가 시간순으로 건별로 축적된 것이다. 문서의 사용 기한은 대략 2개월 전후였으며, 1 면에 4행을 원칙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규격과 종류의 문서가 릴레이식으로 기간별로 목간을 달리해 가며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목간 장부를 쓰기 시작할 때는 1행에 이전 목간 장부의 기재사항을 축약정리해 기재했다. 이 목간은 최종 보고 문서라기 보다는 현장에서의 관리 문서, 실무 장부의 성격이 강 하다. 기재사항의 핵심은 金의 출납과 수량, 일시 그리고 제작된 물품의 목록이었다. 문서 제작의 주체는 금 공품을 제작하고 관리하는 부서로 보인다. 목간1과 목간2는 동남리 유적 초석건물 동과 서의 배수로에서 출토된 것이므로, 건물지를 중심으로 한 유 적 주변이 瓦의 공진 집단에 대한 稗의 지급, 金工品의 제작 담당과 관리를 담당하는 관서였을 것으로 추정 된다. 해당자료는 泗沘時代 즉 6세기에서 7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 백제 왕도에서 稗, 瓦와 金, 金工品의 출납과 함께, 규격의 서식이 확립된 정밀한 관리 문서 작성과 문서행정이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해당 자료는 瓦와 金工제작 관련 수공업 체제를 추정하는 데도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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