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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박순교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박순교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저널정보
영남퇴계학연구원 퇴계학논집 퇴계학논집 제32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51 - 18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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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조호익(1545~1609)은 창원의 명문 출신으로 생장했고, 퇴계와 의 중첩된 혈연을 인연으로 퇴계의 直傳弟子로 수학했다. 그러나 1176년 1년 동안의 결안 끝에 江東으로 全家徙邊을 당하였고, 만 17년 적거의 삶을 살았다. 임진년 국난의 와중 평양에 파천한 선조가 지산을 사면하며 거의를 재촉하자, 지산은 관서 일대의 세력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지산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체직, 파직 당하였고, 마침내는 자신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한 채 초야의 불운한 선비로 영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간 지산 조호익의 전가사변은 최황 개인의 음해로 이해하여 왔으나,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 권력 정점에 위치한 선조의 조치로 파악되었다. 조호익의 주변 인물 모두가 전가사변에 방관적 자세를 취한 점, 견제와 균형을 특질로 한 조선 체제의 속성, 선조가 지산에게 보인 방관적 자세, 최황에 대한 선조의 전폭적 지지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선조가 지산을 신원하지 않고 관서 지방 교육의 진작을 유시하며 내렸다는 ‘관서부자’ 어필 역시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같은 해 선조가 지산 조호익의 전가사변을 이끈 인물이자, 대척점에 있던 최황을 시비를 논변하는 대사헌에 임명한 점은 이러한 상정을 확실하게 한다. 임란에 즈음하여 조선 조정이 지산을 사면한 점이나, 召募, 치안의 책임을 맡긴 점 역시 선의의 결과로 보기 어렵다. 지산이 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된 것에서 지산의 전공이 조선 왕조에 의해 평가된 듯 비치지만, 조선 사회가 전란 이후 폐쇄적 체제로 회귀하면서, 지산의 출사는 실제 배제되었다. 지산의 영천 은거는 조선 조정과의 불편한 관계가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지산의 영천 은거는 上祖와 일대의 인연, 정세아 일가와의 관계가 작용했다. 영천 은거 이후에도 지산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현실 극복의 치열한 노력이 학문 연마와 육영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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