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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희숙 (목포대학교 사학과)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호남학 제73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219 - 25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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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이 자서한 ‘新羅西面都統ㆍ指揮兵馬制置ㆍ持節ㆍ都督全武公䓁州軍事ㆍ 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ㆍ上柱國ㆍ漢南郡開國公ㆍ食邑二千戸’는 자신이 백제의옛땅이었던 신라 서쪽 방면 즉 전주ㆍ무주ㆍ공주 등지의 군사권과 민정권 등을장악하고 있는 통치자로서, 신라왕과 거의 대등한 지위라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삼국 왕들의 책봉호와 유사하게 자서함으로써, 이러한 지위를 당나라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처럼 꾸미려고 했던 듯하다. 견훤은 이를 통해 신라 군인 출신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또 자신의 지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견훤이 대외적으로 왕을 칭하지 못한 것은 무진주 호족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은 자신이 활동했던 전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키워 무진주를 장악하였다. 즉 무진주의 호족들은 견훤의 군사력에 굴복한 것이다. 그리고 견훤은 자신이 방수군으로 활동했던 순천ㆍ여수 등의 전남 동부지역을 기반으로 건국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이미 이 지역 출신의 박영규와 김총등이 견훤 정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진주 시기의 견훤 정권에서 무진주 지역 호족들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짐작할 수있다. 이와 관련하여 891년(진성여왕 5) 개선사지 석등에 명문을 새기는 불사를 주도한 승려 입운 등이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노력하고 있었던 사실이 주목된다. 그리고 견훤이 무진주를 침공할 무렵, 무주를떠난 심희와 찬유, 충담 등의 행적도 견훤 정권에 대한 이 지역의 동향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견훤은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지만, 900년 전주로 천도한이후 왕을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견훤이 무진주에 서 왕을 칭하지 못한 것은 무진주 지역 사회의 동향과 관련이 있었다. 즉 견훤에게 정복당한 무진주 지역의 호족들은 언제든지 전세에 따라 입장을 바꿀 수 있는세력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무진주의 호족들은 견훤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상실하였고, 박영규와 김총 등 전남 동부지역의 호족들이 주도하고 있는 견훤 정권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무진주 호족들은 견훤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이것은 견훤에게 커다란 불안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견훤은 무진주에서 정권의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결국 전주로 천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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