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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변동명 (지역사연구소)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호남학 제73호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117 - 160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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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견훤정권의 광주 도읍시기를 더듬으며 그에 담긴 의미를 살폈다. 견훤은 15세 되던 헌강왕 7년(881) 즈음 종군하여 王京에 들어갔다. 이후 順天灣・光陽 灣 일원에서 防戍하는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그 노고를 인정받아 裨將에 올랐다. 그랬다가 진성여왕 3년(889) 무렵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반심을 품고서는 동조자를 끌어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를 단행한 것이 진성여왕 6년(892) 이었으며, 한 달쯤에 무리 5천을 모아 현 전남의 동남지역을 석권하고는 무주를엄습하여 自立・自王하기에 이르렀다. 23세인 889년 이래 조심스레 준비를 진행하여, 26세 되던 892년에 마침내 그 꿈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견훤은 휘하의 방수군을 디딤돌 삼아 거병에 나섰다. 거기에 지지 호족의 뒷받침을 받은 군사적・경제적 기반이라든지 해양활동을 통해 섭취한 선진문물 등을더하고, 더불어 무주호족 출신인 스스로의 토착적 기반과 사회・문화적 소양 내지는 군인으로서의 다양한 경험 따위를 바탕으로 한 그 자신의 식견을 보태어, 反新 羅를 지향하는 거사에 성공하였다. 광주에 도읍하던 초기 견훤의 세력권은 순천・나주지역을 아우르는 무주 일대였다. 그리하여 무주 치소를 중심으로 한 기왕의 통치조직이라든지 기반시설을 활용해 제 나름의 체제를 갖추며 세력권을 확장해갔다. 백제의 부흥・계승을 명분으로 自王하며 百濟故地 모두를 영역권으로 표방하는 것과 함께, 두드러진 군사적역량을 선보였다. 무주지역은 물론 전주와 공주 일원의 호족을 지지세력으로 품는한편, 해양력을 배양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광주를 도읍으로 정권의 틀을 정비하며 창업에 몰두하던 중, 견훤은 문득 전주로 천도하였다. 효공왕 4년(900)이었다. 전주는 그 역사적 경험이라든지 정치적내지 사회문화적 환경의 측면에서, 마한과 백제의 부흥・계승을 명분으로 내세우기에 한층 좋은 환경이었다. 전주는 또한 견훤정권이 표방한 세력권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고장이었다. 창업의 명분에 맞는 백제 옛땅의 수복이라든지, 혹은 숙적신라를 향한 공격이나 고구려 옛터로 진출하는 거와 같은 세력의 확장에, 한결 유리한 지역이었다. 백제 계승의 명분을 확고히 다지고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궁극에 가서는 新羅式 三韓一統을 극복하고 후백제 중심의 새로운 일통을 추구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전주로의 천도가 이뤄졌던 것이다. 견훤의 광주 도읍은 결국 신라에 의한 삼한일통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리하여마한・백제의 정통을 잇는 새로운 일통을 위한 정치적 출발의 첫 걸음인 셈이었다. 백제를 주체로 하는 새로운 일통이라는 웅지를 맨 처음 구상하고 실행 방안을 기획하며 그 구체적 실천의 하나로서 전주 천도를 단행하기까지 견훤정권의중심이 광주에 있었다. 후삼국시대의 문을 맨 처음 열어 일대 전기를 마련하며격동기를 앞서 이끌어간 후백제가, 새로운 일통을 향한 창업의 기틀을 갖추고 기반을 다져가며 역사의 무대에 본격 등장하기에 이른 최초의 중심이 광주였다는점에서, 견훤정권의 광주 도읍시기가 지닌 의미는 결코 낮춰 평가해서는 안 될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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