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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지호 (국립부여박물관)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백제연구 제77호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187 - 20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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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의 대표적인 불교 사찰로 왕궁지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유적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백제시대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강당지 석불 등이 전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최근에 이루어진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사비기에 흙으로 만든 200여 점의 소조불상이 기와 폐기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량과 형태에 있어 백제뿐만 아니라 당시 한반도의 불교 사찰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수량의 소조상이 사찰의 어느 공간에, 어떠한 형태로 봉안되었는지는 중국과 일본의 봉안 사례, 소조상 출토 위치를 검토하여 목탑 내에 봉안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소조상은 200여 점으로 보고되고 있어 금당지에서 출토된 대형 소조상편을 제외한 나머지를 목탑에 봉안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하였을 것이다. 정림사지 동서 회랑지 북쪽의 부속건물지와 강당지로 불리는 건물에 대해서도 소조상 봉안 장소였을 가능성을 열어 두고 ‘塑山水壁’과 같은 입체적인 불교회화의 제작 가능성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백제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추진하면서 국호의 재정비, 주변 국가와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 등을 통해 백제의 부흥을 알렸다. 성왕은 사비 도성의 정비에 맞추어 541년 양나라 장인의 파견을 요청한다. 양나라 장인의 요청은 사비 도성의 정비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려는 배경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비 천도 직후에 건립된 정림사지는 빠르게 건립하기 위해 경제적이며 비교적 수급이 편리한 소조상을 중심 불상으로 선택하였다. 그 결과 정림사지에서는 다른 사찰보다 많은 소조상을 제작, 안치하게 되었으며 성왕은 정림사지에 다양한 형태의 인물 소조상을 제작, 안치하여 사비 천도를 통해 이루고자 한 백제 부흥의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다. 특히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무인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불리한 정세에 놓여 있던 백제의 군사적인 부흥을 도모하려는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정림사지가 가지고 있는 군사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성왕은 중국 양나라와의 기술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최고의 불교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신라와 왜)에 적극적으로 불교를 전파한다. 사비 천도 직후에 진행된 정림사지 창건은 불교적인 권위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왕의 의도하에 진행되었으며, 사비 도성의 정비를 통해 백제를 부흥시키는 신호탄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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