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재범 (육군박물관)
저널정보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통일인문학 제62집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139 - 169 (31page)
DOI
10.21185/jhu.2015.06.62.139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백제는 부여계의 건국세력과 마한계의 피지배세력으로 이루어진 이중적(二重的)주민구성의 모습을 띠고 있다. 부여계의 건국세력은 동명묘(東明廟)를 숭배하며 부여계임을 지켰고,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4세기 후반까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만 미쳤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의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남천(南遷)이후 백제내에서 동명신앙이 쇠퇴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원인으로 백제의 도성이 한강지역에서 웅진으로 옮겨졌다는 점을 고려 할 수 있다. 이때 웅진은 백제의 직접지배가 된지 불과 1백여 년 밖에 되지 않았기에 백제 지배세력의 정체성이 전파되기에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한계 피지배세력은 백제의 천도 이후 백제의 중심세력으로 포함 되었다. 즉 건국집단의 부여계 정체성이 약해지고, 마한계가 중심세력으로 편입되면서 백제가 부여계의 국가가 아닌 마한계 국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백제의 첫 번째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은 방어와 경제력이 중시되어 선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도성인 웅진(熊津)은 좁은 지형 때문에 인적 · 물적 자원이 확보가 힘든 임시적 성격을 띤 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4세기 후반까지 백제의 직접적 지배가 오늘날 충남 일부 지역까지였기 때문에 웅진 이남의 지역으로 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도성인 사비(泗?)는 금강이 방어선을 형성해주고 평야가 인접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역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사비로의 천도는 백제 중앙 지배세력의 마한계 중심지였던 익산으로의 접근이며, 마한 세력의 융합을 다분히 염두에 둔 정치적 조치와도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백제의 웅진과 사비로의 천도는 군사적, 지리적 요소 또는 지역 세력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더불어 부여계와 마한계의 융합(融合) 차원까지 고려된 천도라 볼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백제의 지배력 확장과 정체성 변화
3. 백제의 천도와 그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001-0016394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