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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은일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80輯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451 - 493 (43page)
DOI
10.31335/HPTS.2023.04.8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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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수군진(이하 가리포진)은 1521년(중종 16)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첨절제사가 주둔하면서 예하에 다수의 수군만호진 등을 거느리고 있는 거진(巨鎭)이었다. 가리포진이 들어서게 된 것은, 완도 일원이 왜적의 주요 통로 내지는 해양 방어의 요새지였다는 것, 그리고 목장 관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한편 이 가리포진이 설치되면서 전라우수영의 방어체제는 기존 임치도진만의 일원적인 해양 방어체제에서 이원적인 체제로 변화되었다. 가리포진은 1555년(명종 10) 경 수군 방어체제가 변화됨에 따라 편제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시 가리포진은 전라우수영은 물론이고 3도 수군 중에서도 단연 도드라진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직후 가리포진의 편제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관할 신지도진 폐지, 고금도진 신설, 신지도진 재설치 등에 따른 결과였다. 이러한 변화는 전라우수영의 최일선을 보강한다는 것과 왜구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가리포진은 1854년(철종 6)에 독진으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효율적으로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과 서양 군선 출현에 대한 대비책의 일환이었다. 가리포진은 1866년(고종 3)에 완도지역에서 가장 외해(外海)에 위치한 청산도에 첨사가 주둔하는 독립된 수군진이 설치되면서 편제와 위상에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1895년 군제 개편으로 폐진되었다.
가리포진 첨절제사 휘하에는 평균 600여 명의 군관(軍官)·인리(人吏)·수군(水軍) 등이 근무하였고, 방수군(防戍軍) 1,530여 명 내외가 배정되었다. 가리포진의 수입은 신역가와 토지세 약 280여 결이 있었는데 그 중 토지세는 관할 백성들에게 배당되었다. 그런데 이 수입액 중 신역가는 제대로 거둬들이지 못하였고 토지세는 선혜청, 총제영, 금위영, 군자감, 종친위, 의정부, 중추부, 승정원, 통영문, 수영문, 사령들의 역가(役價) 등과 기타 운영비로 지출하다 보니 수군진 재정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조선후기 가리포진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전선은 모두 9척 정도였다. 이 전선들은 보존상태가 매우 열악하였고 폐진될 무렵에는 모두가 파손되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가리포진에는 성보(城堡)가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1522년(중종 17) 경이었다. 가리포진성의 내부에는 동헌·내아·형청·훈련청 등 상당히 많은 관아 건물이 즐비하였다.
가리포진의 기능은 해양 방어를 비롯하여 병선 건조와 관리, 봉수 또는 요망대 관리, 송전 및 황장봉산 관리, 유배인 관리·감독, 조운선 호송 등이었다. 가리포진을 설치한 일차적 목적은 해양 방어에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반 행정 및 세역 수취 등의 대관 업무에 치우치다 보니 자연 해양 방어 임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가리포수군진의 설치와 그 추이
Ⅲ. 가리포수군진의 운영
Ⅳ. 가리포수군진의 기능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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