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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희면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0호
발행연도
2018.5
수록면
33 - 6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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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사마재는 중종 32년(1537)에 건립되었다. 생원 합격한 경력이 있는 현감 김윤장이 사마재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사마안도 작성하였는데 다른 고을과는 다르게 현재 사마재에 드나드는 생원 진사만을 기재하였다. 그리하여 수령을 포함하여 모두 6명의 이름으로 곡성사마안이 작성되고 사마재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생원 진사들은 사마재에 모여 강신과 상호부조 등의 활동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곡성사마재가 불타버리기 전까지 곡성사마안에 이름을 올린 생원 진사들은 곡성 신씨 이외에는 해주 오, 순흥 안, 순창 조, 금산 김, 전주 이씨 등 외가나 처가, 또는 이거, 謫居의 연고로 곡성에 입거하여 서로 婚脈을 이루면서 양반으로 터를 내린 집안들이었다. 임진란 때 곡성 사마재는 불타버렸다. 선조 37년에 재력이 부족하여 사마안만 다시 작성하였다. 사마재의 복설 노력, 사마안의 복구는 전란으로 흐트러진 향촌사회의 질서를 다시 잡아나가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양반사족들이 선조 37년에 鄕案을 새로이 작성한 것과 같은 의도였다. 향안에 이름을 올린 10개 성관 가운데 여섯이 사마안에 이름을 올린 성관이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사마안을 새롭게 改裝하였다. 생원 진사가 연이어 합격하자 드디어 사마재가 1779년(정조 15)에 복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양사재도 함께 건립되었는데, 사마재가 중건되고, 양사재가 건립되는 것은 모두 양반들의 주요한 활동장소였던 향교의 기능 확대라 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향촌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양반사족들의 보수화 노력이었다. 선조 37년 이후 철종대까지 사마안에 이름을 올린 생원 진사는 모두 23명이다. 기존의 姓貫이 寡占을 하는 가운데 18세기 이후 새로운 성관(성주 이, 풍산 홍, 초계 정 등)이 사마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들도 곡성 고을에서 양반으로 인정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곧 곡성 사마안은 양반들의 독점물로 유지되어 왔다. 고종대에 12명의 생원 진사 합격자 가운데 3명만 사마안에 등재되었다. 제외된 이들은 향리나 부유한 평민들로 보이며, 이들과 사마안에 등재된 양반들과의 향전은 언제든 예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곡성 사족들은 1882년 진사 합격자를 끝으로 사마안 등재를 중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에 吏族이 편찬한 『谷城郡誌』에는 사마안에서 제외되었던 사람들도 수록되었다. 그런데 1923년에 양반 후예들이 편찬한 『浴川續誌』에는 사마안을 그대로 轉載하고, 사마안에서 배제된 이들을 新增이라 하고 따로 수록해 놓아 아직도 반상의식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해방 이후 편찬된 『곡성군지』(1956년), 『곡성향교지』(1962년)에는 생원 진사의 합격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 수록하고 있다. 이는 자기 선조들을 빛내려는, 그리고 양반의 후예임을 주장하려는 후손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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