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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희면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30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279 - 30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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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원, 사우는 양반들의 교육기관으로, 당쟁의 여론 기구로, 서원 후손들의문중 기구로 시대에 따라 성격이 변모되어 갔다. 평산 신씨 종중의 기구로 변모해 가는덕양사의 모습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1589년(선조 22)에 지방관 후손들이 앞장서고 곡성의 후손들이 힘을 보태 신숭겸을모시는 사우를 건립하였다. 덕양사는 강당과 서재를 갖춘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1695 년(숙종 21) 3월에 서인의 후원에 힘입어 「덕양」이라는 이름의 사액을 받았다. 곡성고을에서 유일한 사액사우이기에 유생들과 후손들은 사회적 위세를 더 할 수 있었다. 덕양사는 노론의 경원장 제도를 채택하였다. 유생안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은 곡성의양반이었다. 덕양사는 곡성 양반들의 모임처이자 향촌기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경제기반을 살펴보면 서원전과 노비 이외에, 관아의 도움이 재정의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지출은향사 비용이 대종을 이루고 서원 유지와 사회적 활동에 소요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평산 신씨 후손들이 덕양사 운영에 보태기 위하여 別庫를 만들었다. 그리고 1854년에 지방관으로 내려온 후손들이 宗契를 만들어 더욱 운영에 간여하였다. 19세기에는 서원, 사우가 후손들의 문중 기구로 변모되어 갔다고 할 수 있는데, 덕양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1871년(고종 8)에 덕양사는 철훼되었지만, 후손들이 遺墟碑를 세웠고, 龍山壇을 만들어 제향을 계속하였다. 1934년에는 조상을 현창하고 문중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덕양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복설하였고, 이후에도 중수, 중건을 하여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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