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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영숙 (상명대학교)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49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99 - 119 (2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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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대원군은 정치 권력을 사이에 두고 세 차례나 서로 반목하며 갈등하였다. 1차 갈등은1873년 10월 25일부터 고종이 조정 신료를 교체하면서 친정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효의 도리를 두고 고종 측과 대원군 측의 갈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종은 친정의 형식을 통해 정면 충돌의 길을 선택하였다. 권력에 대한 고종의 의지도 강했고 황후 또한 친정 식구들을 동원해 국왕에게 힘을 보태려 한 측면이 컸다. 2차 갈등은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정계에 등장한 대원군의 2차 집권으로 인해비롯되었다. 2차 집권 기간은 1882년 6월 10일부터 청의 천진 보정부로 대원군이 압송된 7월 13일까지 33일간에 불과하다. 기간은 짧았지만 고종이 추진하던 개화정책을 백지로 돌리고 황후의 국상을 추진한 것이 빌미가 되어 부자지간은 정적관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대원군이 귀국한후 그가 정치적 세를 확대해 나가는 길을 원천 차단하였다. 3차 갈등은 갑오농민항쟁 진압을 이유로 일본이 조선 내정에 개입하면서 대원군을 옹위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한 데서 시작되었다. 대원군의 3차 집권 기간은 일본이 경복궁을 무단 침입한 이튿날인 1894년 6월 22일부터 10월 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이다. 개혁에 동원된 대원군은 일본에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청군과 내통하고 동학농민군을 교사하여 일본을 협공하도록 하였다. 계책이 탄로가 되어 대원군은 정계 은퇴를 하였으나, 일본은 그를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적극 활용하였다. 양자간의 해묵은 갈등 관계는 황후시해를 오래전부터 있어 온 대원군 측과의 알력에서파생된 사건으로 포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요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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