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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사회와역사 제105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287 - 31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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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강압과 수탈이라는 이미지에 의해 묘사되어 온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에서 식민 지배자와 함께 들어온 민간의 일본인들은 식민 지배자와 동일한 범주로 간주되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한국의 학계에서 이전에는 생소했던 ‘재조일본인’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0년대 이후부터이다. 일본이나 미국 등지의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의 연구자들은 일제 시기 재조 일본인 지식인들의 자기정체성과 식민지 조선의 인식에 대한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기존의 연구가 정치와 경제를 중심으로 한 체계와 구조의 거대서사를 구축해 왔다고 한다면, 이들 연구들은 역사와 사회, 문화와 문학, 여성과 이주민 등에 대한 다양하고 혼합적이며 분산적인 포스트모던의 문제의식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반영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1896년 일본에 의한 강제 개국부터 시작된 일본인의 이주는 러일전쟁 이후 3만 명을 넘기 시작하여 식민지배의 초기인 191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으며, 1930년에는 50만 명을 넘어 1942년에는 7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직업으로 보면 이들 대부분은 상업과 교통업 및 공무자유업에 종사하였다. 후자에 속하는 지식인 집단은 주로 학술 연구와 교육, 언론 등의 분야에 종사하였는데, 이중에서도 극히 소수였던 경성제대 교수는 식민지배의 이념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재조 일본인들 중에서 극히 소수는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피지배민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향하였으며, 재조 일본인 사회는 이들을 매우 비정상적이고 이단적인 인물로 간주하였다. 빈부격차와 궁핍화, 실업이 증대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미야케는 자본가 계급의 착취를 극복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도구로서 국가의 지배를 타파한다는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에 공감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이러한 혁명 이론을 실천한 대가로 대학에서 추방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주류 일본인 사회로부터 냉대와 고립을 감수해야 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뚜렷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식민지 사회에서 미야케는 지배 영역에 속하면서도 피지배 진영에 자발적으로 가담하였다.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서 미야케가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인의 혁명운동에 참가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이후 평생에 걸쳐 자신과 가족의 총체적인 몰락과 불행을 감수해야 했다. 식민지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10년이 채 안된다고 하더라도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대가와 지배블록의 보복은 어둡고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의 실상과 아울러 나아가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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