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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2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39 - 61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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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목적은 3.1운동 이후 시작된 차미리사의 여성교육운동이 한국근대교육사 및 한국여성사에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는 ‘며느리 학교’와 ‘기생 학교’가 대부분이라는 당시 사회적비판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차미리사의 여성교육운동과 근화여학교 설립의 역사는 한국 여성교육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근화여학교의 성격은 1899년 찬양회 여성회원들이 설립했던 순성여학교의 성격을 잇는다고 할수 있는데, 조선여성들의 현실을 파고드는 조선여성들의 교육운동이 어째서 20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재개될 수 있었는지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한국의 여성교육은 식민당국과 조선사회의 민족, 젠더, 계급 차별이 중층적으로 얽혀 있는 상황 속에서 거의 방치 수준에 있었다. 극소수의 배운 여성들이 ‘신여성’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대부터 사회진출을 시작한 것에 비해, 학교에 다니지못한 많은 여성들은 ‘구식여성’으로 명명되어 시대에 뒤쳐졌을 뿐만 아니라 ‘야만’적상태에 머문 무능력자로 열등시되었다. ‘구식여성’들을 배움을 통해 인간적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했으며, 차미리사는 1919년9월부터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여자교육회(조선여자교육협회)가 개최한 야학, 강습소, 강연회에는 배움에 목마른 여성들이 밀려왔다. 차미리사는1925년 10월 근화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한 뒤에도 ‘구식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이어갔다. 속성과정을 따로 두고 입학연령과 입학시기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여성이 공부하는 것은 ‘허영심’ 때문이라는 가부장적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대에 차미리사는 교육을 여성의 생존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했다. 여성이 인격적으로독립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실업교육을 통해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미리사의 신념은 1934년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설립으로 일단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배우지 못하여 설움을 받고 살았던 당대 조선 여성들의 간절한 바람에 응답했다는 점에서 차미리사의 교육운동은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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