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광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64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39 - 270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연구는 17세기 후반 복현 된 영양현에서 주자와 송시열을 배향한 운곡영당이 치폐를 다룬 연구이다. 영양현에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新舊鄕간의 향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인 『雲谷影堂掌故』를 근거로 관찬사료에서 비교적 간략히 언급된 운곡영당의 치폐를 살펴보았다. 18세기 초 서원은 중앙 집권세력에게는 자파 세력 부식을, 재지사족에게는 향촌 주도권을 확보하는 세력 간 분기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영남에서도 갑술환국 후 중앙 노론세력과 지방 관권의 지원과 이에 부응한 신출노론의 협조 하에 20여개소 노론계 원우가 건립되는데 이중 송시열을 배향한 원우가 그 비중이 제일 높다. 영양현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신향세력들이 京鄕의 자문을 받아 곡절 끝에 1781년(정조 5) 윤5월 영당을 건립했으나 9월 경상감사로 부임한 소론계 趙時俊에 의해 서원을 신설한 혐의로 곧바로 훼철을 당한다. 5년 뒤 영조연간 朝野에 파란을 일으킨 안동 김상헌 서원의 후신인 西磵祠가 1786년(정조 10) 사액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중건이 이루어진 듯 했으나 남인들의 저지로 무산 된다. 이에 운곡영당 측은 성균관 등에 통고하여 훼철 주도자를 儒罰하고, 1802년(순조 2) 2월 노론계 감사 남공철의 부임과 때를 맞춰 중앙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중건에 성공한다. 그러나 1806년(순조 6) 2월 소론계 감사 尹光顏에 의해 또 다시 훼철을 당하자 임금에게 상서하여 진상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훼철과정에서 移奉 예절 등에 심각한 문제점이 규명되면서 훼철 관련자들은 처벌을 받지만 더 이상의 영당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운곡영당은 중앙으로부터 인정받은 영당임에도 3차례나 훼철되었다. 이는 구향에게는 향촌내 우위를 지속하기 위한 절박한 문제였다. 반면 신향은 3차례나 영당을 건립을 시도할 만큼 성장하여 향권에 도전했다고 할 수 있다. 운곡영당의 치폐는 이러한 신구향이 충돌한 사건이자 조선후기 영남 노론계 원우 건립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