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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원석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 제79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93 - 32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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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존의 연구시각을 확대하여 1934년 呑虛 宅成의 출가 背景을 살펴보면서 漢巖 重遠과의 佛緣을 고찰한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과 日帝의 민족말살통치 아래 寺刹令 체제는 불교에 대한통제를 훨씬 강화하였다. 불교계는 朝鮮佛敎禪敎兩宗僧侶大會와 全國首座大 會 등을 열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당시 五臺山門에는 漢巖과 智巖이주석하여 月精寺의 부채를 정리하고 佛敎界를 주도하면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부터 普天敎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 아래 교단의 분열과 교리해석의차이로 본격적으로 해체되었다. 敎主 車京石은 교리의 보수화로 대응하였으나, 탄허의 부친 金洪奎는 핵심교직에서 밀려났다. 車京石의 죽음과 함께 보천교는 결국 1936년 강제 해산되었다. 그런데, 만주사변 이후 五臺山 주변에는 보천교도들이 모여들었고, 탄허의 友人들도 普天敎的 성향이 강하였다. 이는 탄허가 출가하는 하나의 배경이었다. 1932년부터 탄허는 老莊의 修學을 연유로 漢巖과 佛緣을 맺었고, 결국1934년 漢巖의 老莊과 傳統學術, 佛學, 人品 등으로 인해 출가하였다. 呑虛가漢巖에게 華嚴 등의 佛學을 수학한 因緣은 한국 불교의 敎學史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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