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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환 (수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5 - 41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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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박 환 문창범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니코리스크에 기반을 두고 귀화 비귀화인 등 모든 한인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 회장에 이어 대한국민의회 의장에 선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문창범은 명실공히 러시아지역 한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문창범은 러시아혁명 후인 1917년 8월 볼셰비키와의 타협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이 임박한 시점인 1918년 7월에는 이동휘 등 한인사회당 세력과 제휴하여 볼셰비키 세력의 지원을 받는 의용대 조직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 또한 문창범은 전로국내조선인회의의 결의에 따라 선전부장인 이동휘를 중심으로 추진하게 된 독립군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에도 진력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러시아지역에서 1919년 3월 17일 오전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서는 회장 문창범, 부회장 김철훈, 서기 오창환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문창범은 특히 니코리스크 코르사코프카 거리에 있는 동흥소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동일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오후 4시에는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대한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해가 진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분승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과감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총영사는 러시아요새사령관과 연해주 장관에게 문창범의 체포와 한인의 시위운동 금지를 요구하였다. 문창범은 3.1운동 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의 가까운 측근인 원세훈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상해임지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을 시도하였고, 양측의 합의에 따라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의 해산결의를 선언하였다. 그 후 자신도 교통총장에 취임하고자 상하이에 갔으나, 상하이 임시정부 측이 해산치 않고 개조함에 머물렀기 때문에 입각을 거부하고 러시아령으로 돌아와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재건 정비하여 유력한 반임시정부세력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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