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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다래 (수원광교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67 - 10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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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구한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약 30년 동안 국내ㆍ만주ㆍ연해주ㆍ상해 임시정부에서 교육활동과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오영선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오영선은 1886년 경기도 고양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동경물리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군사학을 배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장인인 이동휘와 함께 국내에서는 개성 보창학교와 성진의 협신중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펼쳤다. 1913년 경에는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광성학교ㆍ동림무관학교ㆍ북일중학교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7년 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후에는 신한촌민회와 한인신보사ㆍ대한국민의회ㆍ기독교청년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자 오영선은 이동휘를 도와 국무원 비서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가져온 자금의 사용용도를 두고 오영선은 이동휘와 노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오영선은 계속 임시정부에 남아 임시정부의 장관인 법무총장ㆍ군무장ㆍ외무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이사장ㆍ상해교민단 학무위원ㆍ한국노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이승만과 각료들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국민대표회의에서는 개조파에 속해있으면서 개조파와 유지파 사이의 중재를 담당하였고, 1925년에는 임시정부 대표로 정의부에 파견되어 합의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으며, 1926년에는 안태근ㆍ여운형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임시의정원과 대한적십자회ㆍ상해교민단ㆍ한국노병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오영선은 1931년부터 병으로 인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했으며, 1932년 임시정부가 항주로 이동할 때 함께 이동하지 못한 채 상해에 남아 있다가 1939년 사망하였다. 오영선은 1910년대 국내와 만주ㆍ연해주에서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0년대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직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단체 간의 중재와 화합을 추구했던 인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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