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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제훈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82호
발행연도
2021.2
수록면
97 - 138 (42page)
DOI
10.21490/jskh.2021.2.8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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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세종실록』에 수록된 「오례」가 조선 최초의 국가례 편찬물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해당 편찬물이 작성될 수 있었던 배경과 특징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글에서는 유교적 의례의 정비는 오랜 관습이었던 불교적 생활 관습을 대체하는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恒産을 확보하여 恒心을 갖게 한다는 유교적 명제가 세종 시대에 의례의 정비를 통해서 시도되었음을 검토하였다. 민간례와 달리 국가례는 길・흉・군・빈・가례로 범주화된다. 『세종실록』에는 300여 개의 의주가 수록되어 있는데, 유교 의례를 시행하기 위해 이 정도로 많은 의식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세종실록』의 「오례」는 직접적으로는 세종 26년 국왕의 지시로 정리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저변에 세종 치세 전 기간에 걸친 다양한 의주의 작성과 의례에 대한 검토가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례로서 오례가 정리될 수 있었다. 이글에서 주요 개념어로서 동시대의 명나라 예제를 時制, 당・송의 제도를 古制, 조선의 습속을 本俗으로 설정하고, 의례 정비의 지향은 최종적으로 유교적 본속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해석하였다.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서 명을 時王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준하여 시제를 수용할 적극적인 의사가 있었지만, 명에서 예제를 공개하지 않는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 나름의 유교 예제를 추구하였다. 여전히 조선은 시제를 반영하고자 하였지만, 궁여지책으로 당・송의 고제를 능동적으로 참조하였고, 조선 고유의 습속도 유교적 본속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적극 반영하였다. 태종대에는 시제를 주로 채용하고자 하였지만, 시제의 세부사항을 알 수 없는 조건에서 세종 초기에는 당・송의 고제를 전반적인 의례 정비에 원용하게 되었다. 예제에 대한 이해가 심화하면서, 조선 나름의 의례 운영 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세종 중기부터는 조선 나름의 유교적 본속을 점차 갖추게 됐다. 드디어 세종 후기에 독자적인 오례를 정리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세종실록』 「오례」는 미완의 작업이기는 하였지만, 향후 『국조오례의』로 귀결되는 의례 정리 작업의 실제적인 배경이 되었음을 주목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태종대 길례 정비와 古制·時制 논쟁
3. 치세 초반 흉례 운용에서의 古制 적용과 확대
4. 치세 중반 유교 本俗으로서 조의·속제 의식의 모색
5. 치세 후반 의례 운영 경험의 축적과 五禮의 성립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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