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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강훈 (구미중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8호
발행연도
2020.6
수록면
171 - 211 (41page)
DOI
10.31218/TRKH.2020.06.13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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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29년 8월 신라가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던 낭비성을 공격한 사건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신라가 낭비성을 선제공격한 배경, 신라군의 편성과 전략, 낭비성 전투의 실상, 신라의 승리가 가지는 군사·외교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신라는 626년 대당외교를 통해 당을 움직이는 데 성공하였다. 당은 고구려를 압박하였고,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였던 것이다. 백제는 628년 가잠성 공격에 실패하고, 이후 내부의 정치적 상황으로 신라를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신라는 자국에게 유리한 정세가 형성되자 한강 유역의 방어체계 구축을 목표로 포천 반월산성으로 추정되는 낭비성 공략에 나선 것이다.
신라 원정군은 본대와 별동대로 구성되었다. 본대는 3명의 장군이 각각의 단위부대를 지휘하는 삼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총사령관인 대장군 김용춘이 통할하였다. 별동대는 1명의 장군이 지휘하였다. 신라군의 전략은 主攻部隊와 助攻部隊를 별도로 운영하여 主攻지역에 적의 증원을 방해하는 견제공격이었다. 별동대가 비열홀을 거쳐 고구려의 동쪽 변경을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는 평양 방어를 우선하였고 낭비성 구원을 위한 병력 파견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낭비성 전투는 野戰이었다. 소규모 보루 정도의 규모였던 낭비성의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구려는 사전에 낭비성 남쪽 개활지에 방어시설인 坑을 설치하였다. 中幢幢主로 전투에 참여한 김유신이 坑을 무력화시키면서 결국 신라는 낭비성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낭비성 전투의 의미를 찾는다면, 비열홀의 군사적 중요도가 제고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고구려는 도성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비열홀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반대로 신라는 고구려를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비열홀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후 비열홀 지역을 둘러싼 신라-고구려, 신라-당의 갈등과 대립은 낭비성 전투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낭비성 전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조공책봉관계를 이용하여 자국에게 유리한 정세를 조성한 후 이를 활용해 국익을 획득하였다. 여기서 신라가 7세기 중후반 전개했던 실리적 대당외교의 시원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낭비성 위치에 대한 諸論議
Ⅱ. 신라군의 행군 편성과 전략
Ⅲ. 낭비성 전투의 실상과 의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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