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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만호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우리문학회 우리문학연구 우리文學硏究 제65집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09 - 235 (27page)
DOI
10.20864/skl.2020.01.6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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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주 지역의 한문학 자료를 수집하던 중 「쌍수정사적비」의 비문 저자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쌍수정의 건립과 명칭 등에 대한 의문이 추가로 발생하였다. 본고는 자료 고증을 통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고, 아울러 후대 사람들의 쌍수정에 대한 기억을 살펴 쌍수정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쌍수정은 1734년 이수항에 의해 건립되었다. 1624년부터 쌍수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이것은 亭閣이 없는 상태에서 사용된 명칭이며, 이러한 사례는 習俗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빈번하였다.
三架亭을 고유명사처럼 사용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架는 건물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하는 말로 ‘칸’에 해당한다. 따라서 三架亭은 쌍수정의 규모를 지칭하는 말이지 정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쌍수정사적비」에는 비문의 저자가 申欽으로 새겨져 있으나 실제 글은 그의 아들 申翊聖의 樂全堂集에 「雙樹亭記」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신익성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었을 것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낙전당집이 간행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신흠의 글로 언급된 것은 최초 비문을 부탁받은 사람이 신흠이고, 빗돌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쌍수정은 李适의 난 당시 인조의 행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인조의 駐蹕處’에 중점을 두는 입장에서는 쌍수정을 성지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그러나 내란 발생으로 인한 ‘播遷’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국난 재발의 경계 소재로 쌍수정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떤 경우이든 쌍수정과 인조의 행적은 뗄 수 없는 관계로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시작하는 말
Ⅱ. 쌍수정의 연혁
Ⅲ. 「쌍수정사적비」의 저자
Ⅳ. 후대의 기억
Ⅴ. 맺는 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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