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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7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57 - 18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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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는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를 겪은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反正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남인과 서인의 공존화가 이루어졌고, 이괄의 난 등의 내부적인 위기를 경험하였다. 또한 명·청이 교체됨에 따라 국제 질서의 재편을 겪고, 두 차례의 호란으로 국제 전쟁을 치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조대 사회적 양상은 자연 환경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전통시대 자연 재해는 災異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재이는 ‘천변’과 ‘지변’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인조대 재이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데, 연대기 사료와 『증보문헌비고』와 『재이고』를 통해 17세기 조선시대에 재이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통시대 재이론은 중국에서 발달한 ‘天人感應論’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시대 재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 수용하여 인조는 반정군주로서의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신하들은 독단적인 군주의 권력 행사를 제재하고자 하였다. 이에 인조는 기우제를 친제함으로써 民本을 표방하여 天命을 부여받은 임금의 권위를 확인하고자 하였고, 원종 추숭과 왕실 보호에 재이 구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인조의 재이에 대한 태도는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바뀌게 된다. 병자호란 이전에는 꾸준히 ‘천변’과 ‘지변’에 대한 대응을 한 반면, 전쟁 이후에는 ‘천변’보다는 ‘지변’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인조는 전쟁 이후 ‘천변’을 활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자 다른 방안으로 ‘지변’을 선택하였다. 이는 재이구언의 계기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재이 구언 자체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정치적인 견제로부터의 거부로 볼 수 있다. 대신 인조는 민생 구휼에 힘쓰는 태도를 보인다. 기우제를 친제하거나 내탕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행위는 민생 구휼에 인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인조대 진휼청의 역량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인조의 구휼에 대한 태도는 후대에 긍정적으로 평가되는데, 인조의 行狀과 『국조보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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