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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5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89 - 11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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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城의 豆可漁箭을 豆加所와 馬天牧 그리고 도깨비 설화 등과 연관시켜 검토하였다. 두가어전은 蟾津江의 중류에 돌로 쌓아 만든 어로시설이었다. 중앙의 관찬 자료에는 마천목이 이 어살을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데, 후대에는 귀신 내지 도깨비 축조 설화가 더해져 한층 흥미를 돋운다. 이 글에서는 두가어전의 축조 경위라든지 운영 등을 그것이 위치한 고장의 지역사회와 연관시켜 검토하였다. 한국 전통시기의 어살을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이해하고자 시도하였거니와, 먼저 두가어전을 그것이 위치하던 豆加所 지역과의 관련 속에서 살핀 다음, 마천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어살을 조성하고 또 운영하였는지 등을 따져보고, 마지막으로 그에 얽힌 도깨비 설화를 음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두가어전은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초에 마천목이 南原의 豆可川에 설치했다는 魚梁이 곧 그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두가어전의 유적은 全南 谷城郡 梧谷面과 古達面 사이의 섬진강에 위치한다. 두가어전의 존재를 전하는 최초 기록에 나오는 바 소재 하천과 그 어살이 실제 들어선 하천의 명호에 차이가 나거니와, 지리지에 등장하는 남원 두가천은 곧 두가 지역을 흐르는 하천을 지칭하며, 아울러 그처럼 두가 지역을 흐르는 하천인 섬진강에 설치된 어로시설이 곧 두가어전이었다. 두가어전이 들어선 곳은 고려시기의 豆加所 지역이었다. 섬진강의 어량을 관리 운영하는 ‘所’였거나, 아니더라도 섬진강에서의 어로활동과 무관치만은 않은 특수 행정구역이었다. 두가소는 고려후기 들어 점차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선초에 폐지되면서 남원고을로 편입되었다. 마천목의 두가어전은 그처럼 퇴락한 상태이던 옛 두가소의 어량을 계승해서 거의 신축 수준으로 보수한 것이거나, 혹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더라도 섬진강과 연관되었음이 분명한 두가소 주민의 강변에서의 오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마천목은 곡성 지역사회라든지 두가 지역민의 동의와 협조 아래 두가어전을 축조하였다. 대략 태종 9(1409)년에서 17년의 사이, 아마도 태종 12년 즈음이었다. 두가어전은 개설된 뒤 한동안 마천목 내지 그의 집안에서 私占해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머잖아 곡성현의 관할 아래 들게 되었는데, 마침 옛 두가소 지역을 관내로 둔 남원의 관할권 주장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원 두가천 조항에 이 어량이 수록되고, 더불어 남원부에서 두가어전을 수리해 운영한다는 사실이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곡성에서는 그것이 본시 자기 고을의 관할이었음을 내세우며 두가어전을 돌려받고자 애를 썼다. 정유재란 뒤 곡성이 남원부로 폐합되면서 두가어전도 함께 넘어갔는데, 고을이 복원된 뒤에도 돌려받지 못했다는 주장이 나타나게 된 배경이었다. 두가어전의 도깨비 축조 설화가 퍼뜨려진 것은 그러한 속에서의 일이었다. 곡성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새삼 두가어전을 향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 때로 상전 노릇을 하던 남원에 대한 경쟁 내지 견제의식의 발로였다. 두가어전을 실마리로 삼아 마천목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그러한 공신을 배출한 곡성이야말로 왕조의 창업에 기여한 고장으로서, 남원에 못지않은 전통을 지닌 독자적 고을임을 강조하려는 게 저들의 본심이었다. 이른바 도깨비 설화는 두가어전의 관할을 두고 그처럼 남원을 향해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처음 곡성 지역사회에 등장해 퍼져 나갔다. 도깨비 설화의 전파로 두가어전이라든지 마천목과 곡성 사이의 연고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고해지고, 그리하여 곡성에서 두가어전을 관할해야 할 정당성을 주장하기가 한층 용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왕조 창업의 공신인 마천목을 배출한 고장으로서 곡성의 위상이 제고됨으로써, 궁극적으로 곡성이 남원에 뒤지지 않는 독자적 고을임을 과시하는 데에도 도움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임은 물론이었다. 두가어전의 도깨비 축조 설화가 임진왜란 이후 곡성지역에서 처음 생겨나 퍼뜨려지기에 이른 배경은 그러하였다. 곡성과 남원 두 고을 사이의 알력 내지 갈등, 구체적으로는 곡성 지역사회의 남원을 향한 경쟁의식을 배경으로 도깨비 설화가 탄생하였다. 조선후기 들어 곡성과 남원이라는 섬진강 유역의 이웃한 두 고을 사이에 조성된 경쟁의식이 모종의 긴장관계를 자아냈으며, 그러한 가운데 두가어전의 도깨비 축조 설화가 탄생하였다는 데서 그 지역사적 의미를 찾아 마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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