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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23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55 - 206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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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가 조선왕조의 치제 대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즉, 포은이 조선의 신하가 되어가는 과정을 추증과 시호, 문묘 배향, 서원 및 향교 배향, 사원 제의, 묘제 등의 과정을 통해 모색하였다. 포은이 조선의 신하로 되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었고, 이에 따라 조선왕조 치제의 대상자가 되었다. 1401년(태종1) 고려 문하시중 정몽주를 조선의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하였다. 1431년(세종13)에는 충신의 범주에 포함되어 충신도(忠臣圖)에 화상과 칭송하는 글을 넣었다. 1517년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16세기 이후 임고서원(臨皐書院), 숭양서원(崧陽書院), 충렬서원(忠烈書院), 오천서원(烏川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아울러 포은 묘에 대한 정비와 치제, 사당 등이 건립되었다. 이에 포은 배향 및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포은 후손에 대한 관직 부여가 뒤따르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포은의 성역화를 통해 정치권력의 안정화를 도모한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임금들은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해 포은의 상징인 ‘충’과 ‘유교’의 덕목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포은을 충절의 표상이자 인물로 부각시키었으며, 이런 경향은 일제 강점기, 197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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