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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동표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효원사학회 역사와 세계 역사와 세계 제60집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63 - 201 (39page)
DOI
10.17857/hw.2021.12.6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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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과 명 양국의 淫祀와 城隍祭儀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다. 조선과 명 양국의 건국 초기에 단행된 祀典정비는 국가 통치 체제의 정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명나라 태조는 洪武禮制반포로 사전을 정리하면서 음사 정책도 정비하였다. 음사의 이단적 요소 때문에 정부는 효율적 통치를 위해 원칙적으로 음사를 禁毁하였고, 이로써 명나라 일대를 관통하는 법률적 형식으로 제도화하였다. 음사는 민간에 대한 독특한 기능 때문에 각 지방에서 음사를 禁毁하는 조치가 모두 같지는 않았다. 이 점은 명과 조선이 대체로 비슷하였다.
조선의 사전체계 정비는 성종 대 國朝五禮儀반포로 일단락된다. 민간 음사에 대한 정책은 국가의 입장에서 금지를 기본 원칙으로 하였다. 조선에서 국가와 지방의 士族들은 모든 제사에 있어서 비 유교적인 것을 淫祀로 규정하였지만, 음사에 대한 제재는 국가와 향촌의 사족과는 입장이 조금씩 달랐다. 이는 명나라에서 皇權의 음사 인식이 儒臣들의 그것과 일정 부분 달랐던 측면과 일맥상통한다. 조선의 지방관에 의한 음사 철폐는 아주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황묘는 양국의 전근대 역사에서 지역 사회를 수호하고 주민 생활의 전반을 관장하는 神과 神像을 모셔두고, 제의를 거행하는 장소이다. 조선과 명나라 모두 성황제의가 正祀체계 안에 제도적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의 성황묘는 지방사회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성황묘에서 지내는 제사는 성황신앙의 가장 핵심적 표현 형식이었다.
조선의 성황신앙과 성황묘는 주지하듯이 고려이래 중국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다. 성황묘에서 지내는 제의는 國朝五禮儀의 정식 의례 가운데 中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성황제의는 많은 지역에서 淫祠로 분류되어 갔으며, 정식으로 독자적인 제의가 되지 못하다가 그 위상이 점점 낮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 지식인들의 성황묘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었고, 당시 사회의 풍속과 관련하여 禁毁하는 태도로 변화되어 갔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Ⅰ. 양국의 祀典정비와 淫祀인식
Ⅱ. 양국의 城隍祭儀의 正祀편입과 城隍廟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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