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한문고전학회 漢文古典硏究 漢文古典硏究 제34권 제1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3 - 51 (3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梅山 洪直弼은 스승인 朴胤源으로부터 ‘吾道有托’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학문이 뛰어났으나 科業을 포기하고 산림처사로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며 수많은 문인을 배출한 洛論系 학자였다. 그는 학문과 후학 양성의 여가에 3,555수라는 방대한 시를 지었으며, 시가 ‘심오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본고는 그가 젊은 시절에 지은 시를 중심으로, 첫째, 闢邪衛道의 의지, 둘째, 綱常義理의 추구, 셋째, 山居를 통한 自靖의 실천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서 홍직필의 문학세계를 이해하는데 일조하였다. 첫째, ‘闢邪衛道의 의지’를 드러낸 시를 살펴보았다. 홍직필은 조선이 末世가 된 것은 斯道가 洛論과 湖論으로 나뉘어져서 서로 자신들의 의론이 옳다고 다투는 사이 천주교와 같은 異端이 闖入한 것이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사도의 부흥은 분열된 학파의 통합과 함께 선현들을 襃揚하고, 제자들을 독려하여 사도에 귀감이 되는 인재를 양성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기강을 바로 세워야한다고 하였다. 둘째, ‘綱常義理의 추구’한 시를 살펴보았다. 홍직필이 살았던 18세기 전반은 일부 老論 집권층을 제외하고 백성들은 명나라의 再造之恩에 대한 의식이 거의 퇴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문적 자부심과 학문적 배경으로 尊明義理가 남달라서 명나라가 망했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존명의리는 排淸意識으로 확대되었고, 의리 수호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나라 역대 인물 가운데 節義로서 목숨을 바친 인물을 포양하는 倡義정신으로 심화되었다. 셋째, ‘山居를 통한 自靖의 실천’한 시를 살펴보았다. 홍직필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한 이후 과거공부를 단념하였다. 그는 39세에 世子洗馬로 8일간 出仕를 했다가 사퇴한 이후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평생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당대의 현실이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의 파행과 斯道가 점점 쇠퇴해지고 여기에 더하여 서구에서 전래된 천주교가 나날이 성행하는 현실을 말세라고 인식하고 守身安分을 위해 산림에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기르겠다는 自靖의 의지를 드러냈다. 앞으로의 연구과제는 홍직필의 중후반기 이후에 주로 지어진 일상의 시들의 분석하고,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하여 19세기 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상을 찾아보는 연구는 추후 과제로 남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5)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