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48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315 - 336 (2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연구는 1882년에 거행되었던 왕세자 이척(李坧, 1874-1926, 재위 1907-1910)의 혼례 과정과 그 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출생한 순종은 이듬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9세가 되던 1882년 1월 10일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20일에 관례(冠禮)를 행한 후 2월 21일에 민태호(閔台鎬)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본 연구는 왕세자 혼례 절차를 국왕, 왕세자, 왕세자빈(王世子嬪)의 역할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빈(冊嬪), 임헌초계(臨軒醮戒) 등의 의식을 주관하는 자는 신랑의 혼주(婚主)이자 국왕인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이었다. 그는 궁궐의 정전(正殿)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신부의 혼주에게 혼사(婚事)를 명령하고, 빈(嬪)을 책봉하였다. 그리고 왕세자를 보내어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를 것을 명하였다. 혼례 후에는 관민(官民)에게 왕세자의 혼사를 선포하고 축하를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관정을 통해 국왕은 왕세자의 혼례식을 국가의 공적인 의식으로 전환시켰다. 반면 왕세자는 국왕의 명을 받아 신부를 데려와 동뢰연(同牢宴)을 치르고 이후 신부와 같이 조현례(朝見禮)와 묘현례(廟見禮)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의식에서 왕세자는 공경과 친애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왕세자빈은 혼례의 실제적인 주연(主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왕세자빈은 혼례에서 책봉의 대상이었다.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처자는 책봉 의식을 통해 왕세자빈으로 그 지위가 승격되었다. 그리고 왕세자빈은 의례를 통해서 시댁인 왕실에 입문하는 과정을 거쳤다. 먼저 신랑의 인도를 받아 궁궐로 들어가는 친영은 왕세자빈의 입문 의식을 극적으로 나타내었다. 왕세자빈의 입궐을 보여주는 반차도는 왕실 의례 속에 담겨진 민간의 풍속도 보여주었다. 궁궐에 들어간 왕세자빈은 왕세자와 혼례를 치르고, 그 다음날에 국왕과 왕비,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왕대비전(王大妃殿)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종묘(宗廟)에 나아가 선왕(선왕)과 선후(先后)에게 인사함으로써 왕실의 구성원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이와같이 왕세자 혼례는 신랑과 신부의 결합이라는 일반적인 혼례 의식과 더불어 왕세자빈의 신분 상승과 왕실 가족으로의 입문 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