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근대시기 대표되는 시집살이 혼례문화의 원형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시작으로, 19∼20세기 급격한 사회문화변동 속에 다양한 변화를 경험한 혼례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에 앞서, 혼례 변화상을 살피기 위한 비교기준으로, 이전시기인 조선시대에 추구하였던 이상적 혼례문화와 그 실상을 찾아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의 혼례는 유교성리학질서에 입각한 이상적 친영예제의 주창 아래, 실제로는 우귀(于歸)·신행(新行)에 입각한 구조를 유지해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 중기 문집인 『여헌집』에서 당시 혼례관습에 친영을 행하지 않는다고 기술하였고, 『조성당일기』 1616년 기록에는 김택룡의 딸이 8개월 만에 시댁으로 우귀하였다고 하며, 『정조실록』 1791년의 기사에는 신부가 4개월 동안 친정에 머무르다 우귀하였다고 하여, 결혼 후 신부가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가에서 몇 개월 이상 머물렀던 정황을 담아낼 수 있었다.
이처럼 의례서 및 사대부 문집류 등 전해지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선말엽에 행해지는 특징적인 혼례풍경을 정리하면, ① 택일한 어느 날 저녁, ② 신부집에서 혼례식이 진행되며, ③ 이때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축하하는 잔치의 성격을 가지지만, 신랑의 부모는 참석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을 살필 수 있었다. 또한, ④ 신부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기 때문에 시부모보다 처부모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며, ⑤ 일정기간(수개월 이상) 신부의 집에서 머물다가 시댁에 우귀하는 것으로 혼례가 마무리된다.
이러한 우귀의 기간은 조선중기까지 몇 개월 이상이 관행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조선말기로 갈수록 줄어들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기록을 담은 『하재일기』에서는 신부가 3일우귀 및 당일우귀를 행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반 당시의 현지조사 자료를 통해, 서울에서는 당일우귀가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조선중기까지는 몇 개월이었던 우귀의 기간이 조선말기로 갈수록 점차 짧아지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비로소 친영 성격의 시가(媤家)살이 문화가 정착된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기준을 토대로 본문에서는, 근대시기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 혼례문화의 양상과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물론 변화한 혼례문화의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하긴 어려우나, 변화양상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자료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서구 기독교식 시간개념의 도입에 따라 혼례식의 요일이 택일한 날짜와는 상관없이 일요일로 변하였고, 국제 표준시 규정에 따라 오전10시라는 구체적 시간관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서구식 예식장이라는 제3의 공간이 등장하면서, 양가 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자녀의 결혼을 맨 앞자리에서 축하하는 구조가 성립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예식장이 아닌 신부의 집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는 경우, 신랑의 부모가 신부집에 함께 동행하지 않는 사례를 통해서 그 역할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자동차와 기차 등 운송수단의 발달에 따른 우귀기간이 축소되고, 20세기 초반 당시 당일우귀가 보편화되는 사례를 통해, 친영과 같은 성격의 시집살이 문화가 비로소 근대시기 사회·경제·문화변동과 그 맥을 같이하며 정착되었다는 주장에 좀 더 설득성을 실을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의례준칙』이라는 일제의 정책과 조사보고서 등을 통하여, 같은 시대의 우귀기간의 정도에 있어서도 지역적인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20세기 초반의 당일우귀 보편화 현상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혼례형태라는 점을 살폈다.
We have analyzed ideal wedding culture and fact of ritual of the Joseon dynasty era in order to look into transformed wedding culture caused by radical cultural changes in modern era.
As a result, we confirmed that wedding of the Joseon dynasty has followed 'Ugwi(于歸, Bride Entering the Groom’s House after wedding ceremony)' custom in terms of Confucianism structure, not Chinnyeong (親迎, bridegroom personally inducting the bride into his home) This 'Ugwi' was at least several months in the mid-Joseon period. However, the period became 3days at the end of the dynasty (三日于歸, Samil Ugwi, Bride Entering the Groom’s House after Three Days); and ‘a day of ugwi'(當日于歸, dangil ugwi, Bride Entering the Groom’s House after that day) became common in the 20th century.
Next, aspect of wedding cultural change modern era is described into three: First, wedding ceremony day was switched to 10 am of Sunday due to western Christian time.
Second, the advent of western style wedding hall formed structure that both families sit in front to celebrate their son and daughter.
Third, 'ugwi' period decreased because of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such as car and train. Like 'a day of ugwi' was generalized at the early of the 20th century, it is more convincible that marriage life like 'Sijibsari(patrilocality)' culture was settled in modern era.
Of course, since it is dangerous to get only one reason hasty conclusion, lack of consideration in various aspects is the limit of this study. Therefore, we would like to look around situations such as society, culture, custom, regulation, and economic status, which surround wedding cultural change, in next st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