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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치훈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153 - 183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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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과에서 시지가 제도적으로 처음 마련된 것은 976년(경종원년)이었다. 이후 개정과 경정 전시과를 거치면서 시지의 분급 액수는 급격히 줄어든다. 그러나 고려의 토지제도 분급 추이를 살펴보면 시지는 줄어들기 보다는 추가되었다. 공해전은 983년(성종2)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관청 경비의 마련을 위해 두어졌는데, 10년 후인 993년에는 공수시지라는 이름으로 시지가 추가되었다. 또한, 공음전시는 초기에 토지만 지급되다가 1049년(문종3)에 양반공음전시법을 제정하면서는 시지도 함께 주어졌다.
이처럼 양반전시과의 시지는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으나 공해전시나 공음전시와 함께 검토하면 전체적으로 전지에 시지를 추가하는 형태로 수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지 분급은 고려의 역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지에서는 땔나무와 기타 생활에 필요한 산림자원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 산림은 공유지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으나 풍수지리, 음양설 등의 영향으로 금령이 있어 접근이 제한적이었다. 특히 개경은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로 땔감의 소요가 컸으므로 시지를 받은 관료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시지柴地 분급의 목적과 추이
3. 시지柴地 설정의 배경과 활용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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