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귀한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
저널정보
중앙문화재연구원 중앙고고연구 중앙고고연구 제35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83 - 106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문헌과 물질자료를 통해 15~16세기 내수사(內需司)의 왕실 관련 명문자기(銘文磁器) 생산과 한계를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1467년경 왕실 소용의 그릇은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인 관요(官窯)와 내수사에 의해 이원적(二元的)으로 공급되었다. 왕실에서 소비하는 자기 가운데‘국용(國用)’은 관요에서, ‘내용(內用)’은 내수사에서 생산하였다. 하지만 언제 어떠한 이유로 내수사에서 왕실 관련 명문자기를 제작하였는지, 왜 내수사의 제자(製磁) 활동이 중지되었는지에 대한관심은 부족하였다. 백자는 세종대 어기(御器)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조대는 그 수요가 한층 증대되었다. 백자의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1464년 횡간(橫看)이 제정되었고, 1465년 공안(貢案)이 개정되었다. 왕실은 이전에 비해 사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1464년경 내수사에 사기장을 두고 ‘大’·‘中’·‘世’·‘處’명 자기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수사는 사기장 6명만 소속되었다. 백토(白土)나 시지(柴地) 등도 공급받지 못하여 백자 소비 확대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16세기 왕실의 재정 수요는 증가하였다. 그러나 왕실 관련 명문자기는 15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제작된 이후 생산 수량이 감소하였다. 이는 1501년 신유공안(辛酉貢案) 가행조례(可行條例)에 보이는 전용(轉用)과 가정(加定)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왕실은 늦어도 1490년경부터 사옹원의 백자를내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흐름은 1501년 신유공안 제정을 기점으로 일반화되었다. 왕실은 1501년 이후 감결(甘結)을 통해 사옹원의 물품을 공급받았다. 15세기 말~16세기초 관요는 체제가 안정되면서 왕실의 백자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내수사 사기장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수사는 1460년대 왕실 내 백자의 사적 수요를 담당하기 위해 요업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신유공안의 가행조례가 적용된 1501년을 중심으로 한 15세기 말~16세기 초 내수사에 의한 자기 번조는 정지된 것으로 보인다. 내수사와 사옹원에 의한 이원적 백자 공급 체제는 사옹원으로 일원화된것으로 판단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