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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정하 (한국해양대)
저널정보
한국민속학회 한국민속학 韓國民俗學 第69輯
발행연도
2019.5
수록면
143 - 168 (26page)
DOI
10.21318/TKF.2019.5.69.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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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33년 송석하가 경남 · 부산 오광대와 야류의 모태라 주장한 〈합천밤마리오광대〉의 형성과 전승 과정에 나타난 공공성을 구명하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2015년 실시한 조사보고서의 자료와 견해를 바탕으로 〈합천밤마리오광대〉 텍스트와 밤마리의 역사와 사회, 문화의 콘텍스트를 연결시켜 분석과 해석을 시도했다.
19세기 말 낙동강의 수운과 물산의 집산으로 포구와 장시가 발달한 밤마리는 수운 혜택 못지않게 홍수로 인한 피해가 컸다. 이에 1757년 변광주가 청원하고 주민 스스로 축조한 인공둔덕 〈활인대(活人臺)〉 덕분에 1796년 홍수에서 무료 1천 명이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그 일부가 유실되자 1858년경 동민 송학봉과 하진오가 다시 관에 수축을 청원해 〈걸립완문(乞粒完文)〉으로 원정걸립을 승인받았다. 이 원정걸립을 위해 밤마리 주민들은 기왕에 밤마리에서 행해지던 당산제와 매구굿, 우희(優戱)의 전승을 바탕으로 스스로 대광대패를 꾸린 다음 지역 사당패를 비롯한 타지역 매구패, 유랑광대패 등을 영입하여 길굿과 판굿 등으로 볼거리를 갖춘 〈합천밤마리오광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형성된 〈합천밤마리오광대〉는 계급사회 비판, 처첩 갈등, 축사연상(逐邪延祥) 기원 등의 소주제가 응축되어 공동체 재생이라는 전체 주제를 형성했다.
이후 1960년대까지 밤마리와 그 인근에서 공연되던 〈합천밤마리오광대〉는 밤마리 포구와 장시의 쇠퇴와 더불어 명맥이 끊어졌다. 이후 1982년 대야문화제를 계기로 〈초계대(大)광대〉가
복원되고 1994년 보존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탈장승 공원’ 조성과 ‘역사 · 문화 마을’ 지정, 〈밤마리오광대탈춤축제〉 참가 등으로 전승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관과 전문가 매스 미디어에 의해 형성되는 가치가 공공성에 적합한지는 의문이다. 이에 여기서는 19세기 밤마리 주민들이 〈활인대〉 축조와 수축이란 공익을 목적으로 〈합천밤마리오광대〉를 형성해 부산 · 경남에 전파한 과정에서 체험한 반성과 민주성 구현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공성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고자 시도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합천밤마리오광대〉의 형성과 전승
Ⅲ. 〈합천밤마리오광대〉형성과 〈활인대〉
Ⅳ. 사회극 〈합천밤마리오광대〉의 공공성
Ⅴ.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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