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형열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0호
발행연도
2018.2
수록면
375 - 404 (30page)
DOI
10.21490/jskh.2018.02.70.375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화랑세기』 진위논쟁으로 세간에 알려진 박창화를 근대 지식인 연구의 일환으로, 일제하 학술활동과 조선사 연구의 폭을 살펴보는 사례로서 접근한 것이다. 박창화는 어려서 유학 공부를 시작해 고증학 학풍을 계승했다. 관립한성사범학교의 근대교육과 10여 년의 교원 재직 경험이 있었지만 근대적 역사 연구를 접하지 못했다. 그는 한문세계에 기초한 전통적 지식인이고, 독학자였다. 박창화는 1910년대 후반 만주에 다녀왔고 1920년대 이후 약 20년을 일본에 체류했다. 국사강습회의 『중앙사단』에 참여하고, 황실 기록을 관리하는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하면서 일본 국학파의 상고적 복고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박창화는 일본 활동기에 강성한 과거를 되살리기 위한 조선사 연구, 특히 강역 연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우리 강역을 축소시킨 중국과 조선의 ‘고식론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의 역사 연구는 민족주의사학과 유사한 서술 전략을 갖고 있었지만 대륙을 향한 팽창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고, 역사발전의 계기를 모색하는 과학성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실천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논리적 방법으로 민족의 화려한 과거를 상상하는 ‘재야사학’ 형성의 통로가 될 가능성을 담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考證學과 일본 國學의 영향
3. 朝鮮史연구의 목적과 특징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8-911-00181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