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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0호
발행연도
2018.2
수록면
179 - 217 (39page)
DOI
10.21490/jskh.2018.02.7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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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472년 백제 개로왕이 단행한 대북위 청병외교 관련 사료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청병외교의 직접적인 계기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 말미 기록에 대한 原典論的검토 및 『위서』 백제전에 실린 表文을 그 문맥과 내재된 논리에 주목하여 분석한 결과, 그 내용을 온전히 취신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청병외교의 직접적인 계기를 고구려의 잦은 침략으로 인한 백제의 위기 상황 및 고구려 내부의 혼란 등과 결부시켜 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이 글에서는 청병외교의 직접적 계기를 460년대 후반의 六宮문제를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의 갈등에서 구하였고, 백제가 그러한 상황에 주목하여 대북위 외교전략을 수립하였다고 보았다. 육궁 문제는 북위 文明太后馮氏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通婚을 요구했으나, 고구려 측에서 북연(馮氏)의 멸망 전례를 감안하여 거부하면서 발생한 일련의 갈등 상황을 말한다. 430년대 후반 북연의 멸망과 馮弘의 망명 사건은 고구려-북위 사이에 갈등을 야기하여 그 관계가 한동안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문명태후는 과거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풍홍의 손녀였다. 백제는 ‘馮氏’와 관련된 과거의 분쟁이 460년대에 재차 부각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대북위 청병외교를 본격적으로 입안・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백제 표문에 과거 고구려-북위 사이에 갈등을 야기한 북연(馮氏) 멸망과 관련된 사정이 강조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蓋鹵王18년조 末尾기록의 原典論的검토
3. 『魏書』 百濟傳所收表文의 분석
4. 請兵外交의 계기와 六宮문제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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