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필동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회학회 한국사회학 한국사회학 제51집 제1호
발행연도
2017.2
수록면
437 - 489 (53page)
DOI
10.21562/kjs.2017.02.51.1.43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신진균(申鎭均)은 1913년 경북 영해의 평범한 유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주이자 청년·교육 운동가였던 부친(申命燮)은 아들의 중등 교육을 위해 집을 대구로 옮겼으며, 대학 교육을 위해 그를 일본에 유학시켰다. 제5고등학교를 거쳐 1937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사회학과에 입학한 신진균은 1940년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1941년 5월 조선으로 돌아와 명륜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신진균은 대학원 학생과 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수년간 매우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했으며, 교수와 동료들로부터 공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신진균은 일본사회학회에서 3편의 연구발표를 했고, 학회지에 7편의 서평을 기고했으며, 한 권의 번역서를 출판했다. 그의 연구는 조선의 촌락과 가족(친족) 연구에 초점을 둔 것이었는데, 실증적 연구를 중시하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동경제대 사회학과의 학풍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학부 졸업논문은 맑스주의에 경도되어 있었지만, 조선에 돌아온 이후의 연구는 기능주의에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방법론적으로는 사례연구와 역사적 연구로 초점이 옮겨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연구에는 이론적·방법론적으로 융통성이 있었고, 아카데믹한 연구 지향이 뚜렷했으며, 그런 가운데 조선의 역사와 현실에 적합한 사회학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었다.
신진균은 1945년 해방 직후의 시점에서 보면 사회학 분야에서 가장 준비된 연구자이자 교육자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1946년 전반기에는 진보적인 교육·문화 운동에 매우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런 그가 다소 돌발적인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남한에서 더 이상 학자 및 교수로서의 삶을 살 수 없게 된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학계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가족적 배경과 부친 신명섭의 활동
Ⅲ. 대구고등보통학교 시기
Ⅳ. 제5고등학교 시기
Ⅴ. 동경제국대학 사회학과 학부 시기
Ⅵ. 사회학과 대학원 및 일본사회학회 관련 활동
Ⅶ. 명륜전문학원, 명륜전문학교 교수 시절
Ⅷ. 일제 말기에 수행한 연구 활동의 내용
Ⅸ.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7-331-002309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