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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주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54호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209 - 24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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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37년 중국 침략 이래 자국민을 전쟁에 총동원한 상태였다. 전선이 태평양으로 확대됨에 따라 그간 신성한 황군을 더립힌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드러내온 조선인 동원방침에 변경을 가한다. 이로써 조선은 전쟁수행에 중요한 물자와 인력의 공급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여기서 소개한 암본정득(巖本丁得)은 일제강점기 해군 군속이 된 인물인데, 같은 마을 친구 3명과 동시에 남양군도로 파견을 가게 된다. 당시 군속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대대적인 광고도 하였고, 지원 자체를 국가에 대한 개인의 광영으로 몰아붙였다. 물론 돈도 벌 수 있다는 달콤한 사탕발림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남양군도로 향하였지만 그곳은 이미 미군의 육·해·공군력, 바다 속의 잠수함들로 인해 일본군은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의 형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지원과 보급이 단절된 채 패전을 기다리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알 리 없는 암본정득은 그야말로 대동아전쟁의 전장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상황타개를 위해 뉴기니의 거점인 라바울의 안정, 그 북쪽의 트럭섬의 유지는 매우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특히 두 지점의 안녕을 위해서는 뉴기니 섬의 포트모르즈비의 확보는 중요하였다. 바다의 접근이 어려워진 일본은 육상 전진을 감행하였고, 남해지대의 호리이 부대가 투입되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일본군과 접전한 부대는 맥아더의 지휘 아래에 있던 미군과 호주군 연합군이었다. 작전 기간은 1942년 3월 7일부터 1943년 1월 23일까지인데, 공교롭게도 암본정득을 비롯한 용계동 4인방의 사망시점과 대부분 겹쳐 있다.
일본군은 부나-기루와-고나 등 해안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점방어에 배치되어 있었고, 맥아더 사령부는 1942년 10월 1일 반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연합군의 최종 목표는 이 세 지역에 분산된 일본군의 축출이었다. 암본정득은 이 와중에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망하게 된다. 전사한 후 그는 일본 우익의 성소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다. 전후(戰後) 일본은 암본정득을 1959년 7월 3일 합사수속을 거쳐, 동년 10월 17일 수속을 완료하였다.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은 대략 2만 1천 명에 달하고, 신사의 공식적인 견해는 합사철회 불가의 방침이다.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암본정득은 죽어서도 그의 영혼이 일본에 결박된 셈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과거사 청산을 두고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양국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합사철회라는 대국적인 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해군 군속이 된 암본정득
Ⅲ. 여전히 징집 중인 영혼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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