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旺茂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64호
발행연도
2016.8
수록면
7 - 31 (25page)
DOI
10.21490/jskh.2016.08.64.7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국가 의례가 장기간 지속되면 사회구성원 스스로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정치체제가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곳의 일반적 현상이다. 의례처럼 국가행사를 반복하는 것은 곧 그것을 인민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처방이다. 또한 통치는 강압적인 방법보다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효과적이다. 이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간의 의례와 외교 관계에서 늘 생성되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王公族은 대표적인 의례 관련 혹은 대한제국 황실연구를 위한 역사적 키워드이기도 하다. 한국사에서 왕공족은 낯설면서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역사적 용어’이다. 왕공족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자들이 고안해낸 정치적 용어이기 때문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는 했으나 황족들은 그 지위를 영위했으며, 식민지 전 기간을 통해 예우를 받았다. 오늘날 학계와 일반인들을 막론하고 일제식민지기에 대한제국 황실이 격하된 상황에서 억압을 받았다고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고종과 순종이 천황의 신하가 된 것이 대표적인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전세계적인 식민지 상황을 대한제국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대한제국 황족들은 안위를 보장받았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기존의 군주들은 그 본래의 지위를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평민으로 강등되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예우’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明治天皇의 詔書로 규정된 왕공족의 지위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왕공족을 탄생시킨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이용하여 항일과 독립을 추구하던 한국인들을 회유 내지는 전향시키려는 계획에서 내린 방안으로 생각한다. 통감이었던 伊藤博文도 무력을 동원한 식민지배는 인적, 물적으로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식민지에 古來부터 전해지던 지배계층을 유지시키고 피지배층이 그대로 종속되게 만든다면 식민통치자의 강제적 지배가 없어도 저절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식민지 한국인에게 제시하던 정치적 용어이며, 교묘한 통치술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대한제국 황실의 무력화
3. 왕공족의 탄생과 처우
4. 왕공족 제도의 정비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7-911-001399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