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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容一 (嶺南大學校)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33輯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309 - 339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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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陽과 中牟는 모두 趙氏의 대외 발전과 연관이 있었다. 趙氏는 太原 분지를 중심으로 서북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였고, 이러한 전략을 위해서 초기 趙氏는 晋陽을 정치 중심지로 삼았다. 趙簡子와 趙襄子시기, 趙는 북으로 代, 남으로 知氏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여 韓・魏 보다 훨씬 강하였고, 당시 趙의 영토는 이미 魏·韓·齊·燕·中山 등의 국가와 접경을 이루었다.
이러한 확대된 趙의 강역에서 晋陽은 趙의 서북쪽에 치우쳐 있어 새로 획득한 영토를 통제하기에 불리하였다. 따라서 趙는 중원 각축전에 뛰어들기 위해 晋陽에서 中牟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中牟는 獻侯부터 4代 37年 간 趙의 도성의 지위를 지켰다. 中牟가 趙의 도성의 지위를 지킨 시간은 길지 않으나, 趙는 이 시기 中牟를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통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敬侯 시기 趙는 다시 中牟에서 邯鄲으로 천도하였다. 趙敬侯 元年(기원전 386年) 邯鄲으로 천도한 후 趙王 遷 8年(기원전 228年)까지 邯鄲은 약 159年 간 趙의 도성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邯鄲 천도는 이후 趙 발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趙烈侯 6年(기원전 403年)에 趙는 정식으로 諸侯가 된 후, 列國의 兼倂戰에 뛰어 들었다. 이러한 겸병전을 위해 중원과 가까우면서도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역에 도성을 건설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에 가장 합당한 곳이 바로 邯鄲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邯鄲은 太行山 동쪽 기슭, 華北 평원의 서부에 위치하여, 주위의 토지는 비옥하고 水源이 풍부하고 전통적인 중요 농업 중심지역으로 각종 수공업과 농산물을 제공해 주고 있고, 각종 상업 행위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다음으로 邯鄲은 중요한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邯鄲은 북쪽으로 燕·涿, 남으로 鄭・衛와 통하였고, 太行山 동쪽 기슭의 南北 大道에 위치하여, 지리적 위치가 중요하고 교통이 발달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序言
Ⅱ. 趙氏 초기 정치 중심지 晋陽·中牟
Ⅲ. 趙 都城 邯鄲
Ⅳ. 結語
【參考文獻】
<Abstract>

참고문헌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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