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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채미하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61호
발행연도
2015.11
수록면
423 - 45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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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라 중대 이후 신라 왕실의 김유신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推尊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김유신은 사후 문무왕과 함께 二聖의 하나로 聖臣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중대왕실은 무열계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면서 혁거세와 알영을 이성으로, 혜공왕대의 오묘에서는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불훼지종’으로 모셨다. 이것은 김유신의 위상이 중대 초와는 달라졌음을 말하는 것으로, 김유신 후손에 대한 중대왕실의 대우와도 궤를 같이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김유신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는데, 혜공왕 15년 김유신의 혼이 미추왕릉을 찾아간 것이 그것이었다. 미추왕은 혜공왕대의 오묘제 개정에서 시조대왕으로 모셔졌지만, 이와 관련해서 무열계와 내물계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의 혼이 미추왕을 찾아가 호소한 것을 계기로 그 갈등은 마무리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볼 때 김유신가는 중대 말 이후 내물계와 연합하여 신라 하대 그 위상을 유지하였는데, 김유신의 흥무대왕 추봉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흥덕왕은 김유신가를 무열계 및 금관가야지역과 분리시켜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그리고 경명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재추봉한 이유는 후삼국이라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금관가야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유신은 대신에서 대왕으로 그 위상이 바뀌면서 김유신의 무덤을 비롯한 여러 시설물은 대왕급으로 변하였으며 김유신은 금관가야집단의 중시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로써 김유신가는 수로왕묘와 구분되는 새로운 제사권을 형성하였고, 진천의 김유신사는 김유신가의 家廟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에 대한 제사는 취선사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유신이 대왕으로 추봉된 이후에는 취선사가 진전사원 형태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聖臣’ 김유신과 후손의 동향
3. 김유신의 ‘大王’ 추봉과 그 이유
4. 김유신의 推尊과 家廟의 운용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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