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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두규 (동국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창간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107 - 13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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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 중에 능주(陵主)를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본고는 문헌상 왕릉의 능호(陵號) 61개(왕 34, 후비 27)를 확인하고, 이를 통하여 현존하는 고려왕릉의 능주를 파악하는데 일조를 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 왕과 후비는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여된 능호는 이장을 제외하고는 변경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왕과 후비의 능호 기재 방식과 수여 대상자들을 『고려사』의 장지(葬地) 기재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왕과 후비의 장지와 능호 기재 방식은 다음과 같다. 왕은 ‘장(葬)+위치 능왈(陵曰)+O능(O陵)’이라고 하여 위치와 능호를 모두 표시하였지만, 왕후는 능호만 기재하고 있다. 이는 고려초기에 후비는 부왕(夫王)의 능에 합장되어 능호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후비의 위치는 왕에 비하여 낮음을 알 수 있다. 현종 때부터 종속적으로 합장되던 후비가 단독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무신집권기인 희종 ~ 고종시기는 왕의 기재방식이 후비의 3양식과 같이, 장지 방향이 생략되고 ‘陵曰+O陵(추존 왕후 양식)’으로 바뀌는 것은 왕권의 추락을 보여준다. 원 간섭기에는 왕과 후비가 똑같이 ‘葬O陵’으로 기재되었는데, 이는 원출신 공주의 등장과 함께, 후비의 지위가 상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로 공민왕의 쌍릉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초기에 왕릉에 부장되었던 후비가 중기의 단독장을 거쳐, 후기에는 왕과 동일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와같이 능호의 기록은 동일 시기 뿐만 아니라 초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문헌상 장지에 기록된 능호 수여 대상자를 분석하여 그 기준을 살펴보았다. 왕의 능호 수여 대상자는 재위한 왕 · 추존된 왕 · 폐위된 왕이다. 능호를 수여 받은 후비는 제 1비 · 아들이 왕인 후비 · 추존된 후비 · 왕과 함께 폐위된 후비 · 동궁빈(東宮嬪) · 왕의 특별한 우대를 받은 후비와 공주이다. 후비릉의 능호 수여 대상자를 통하여, 고려시대 왕족의 묘제는 능과 묘로 나누어지는 두 가지 유형임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葬地 기록상 王과 后妃의 陵號 記載 方式
Ⅲ. 陵號 記載 樣式
Ⅳ. 陵號 授與 基準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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