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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류금주 (서울장로회신학교)
저널정보
평택대학교 피어선기념성경연구원 피어선 신학 논단 피어선 신학 논단 제4권 제1호
발행연도
2015.2
수록면
7 - 32 (26page)
DOI
10.18813/pjt.2015.0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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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명은 한국의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새문안교회의 첫 한국인 위임목사였다. 그는 새문안교회에서 1920년 12월부터 1941년 8월까지 만 20여 년의 시간을 목회했다. 그의 목회의 시작은 한국 교회가 선교의 시대에서 교회의 시대로 전환하던 시기와 맞물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제말의 군국주의 전횡이 한국 교회를 휘몰아칠 때 그 압박을 견디던 중 새문안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의 첫 목사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 이곳의 첫 한국인목사로서 차재명이 감당했던 사역의 시야는 근대 한국 교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걸머졌던 언더우드의 사명의 중량에 가 닿았다. 차재명은 교회의 시대에 임한 한국 교회 전반을 향해 일하고 있었다. 선교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 사이의 연계 그것이 그의 사명의 정계(定界)였다.
그는 기왕의 선교사와 한국인 각각의 장감연합기구를 하나로 합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초대회장과 그 이후 수년간 동 기구의 회계로 일하면서 선교사와 한국 교회 사이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서 가교(架橋)의 역할을 수행해 갔다. 그가 『朝鮮예수교長老會史記』를 편찬한 일이나 한국의 주일학교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일은 한국 교회의 과거세대와 미래세대를 연계하는 사명의식에서였다. 한편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장로교 총회장으로 선임되던 무렵 차재명은 줄곧 총회 외국전도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꿈꾸던 한국과 세계가 복음으로 하나 되는 일이 외국전도에 기울인 그의 노력에서 구체화 되고 있었다.
한편 1938년 차재명이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이사를 수락한 문제를 두고 벌어졌던 경성노회와 총회와의 갈등은 우선 당시 한국 교회 내에 실재했던 서북 교회와 서울 교회 사이의 갈등을 노출시켰을 뿐 아니라 나아가 한국 교회가 교회의 시대에서 일제 말 군국주의 전횡 아래서의 생존의 시기로 옮겨갔음을 드러내주는 일이었다. 1939년 차재명이, 그의 교회 위주의 보수적인 신학에도 불구하고, 조선신학교 기성회 이사로서 활동한 일은 일제말 신학교육의 중단과 그로 인한 한국 교회 미래의 단속을 염려한 그의 충심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서울과 서북 그 신앙지형(信仰地形)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새문안교회의 첫 한국인목사로서 한국 교회 전반을 향해 가진 그의 사명의식에서 촉발되고 있었다.

목차

Ⅰ. 서론
Ⅱ. 차재명의 새문안교회 부임 과정에 나타난 한국 교회 신앙지형
Ⅲ. 차재명과 언더우드, 그 사역과 신앙에서의 연계성
Ⅳ. 한국 교회 진흥을 위한 차재명의 사역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한국어 요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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